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커보이던 오바마가 위기에 빠졌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맥케인보다 지지도가 10% 이상 앞서던 그는 이제 반대로 맥케인에 10%정도 뒤쳐지는 상황이 되었고, 이렇게 간다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로 만족해야만 할 듯 싶습니다. 오바마가 이처럼 위기에 빠진 것은 그가 돌품을 너무 일찍 일으켰고, 그러한 돌풍을 선거때까지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첫번째 원인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공화당 정부가 망친 8년간의 잘못을 바로잡고, 다양한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기에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그가 그러한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늘면서 그의 인기가 주춤해졌습니다.

오바마의 발목을 붙잡은 또다른 요인은 부통령 후보의 선택입니다. 보통 부통령 후보 대통령의 단점을 메꾸어줌으로 표를 더 많이 끌어들일 사람을 선택하는데, 오바마에겐 힐러리 클린턴이나 존 에드워즈 정도가 적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경선 끝까지 지나치게 권력에 대해 집요한 모습을 보여줌으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버렸고, 존 에드워즈는 혼외정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부통령 후보가 되기엔 부적합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조 바이든을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민주당 지도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죠), 인기도 낮고 지명도도 부족한 조 바이든은 오바마가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맥케인은 새라 페일린이라는 무명의 정치신인을 선택했는데, 의외로 페일린 돌풍이 일어나면서 단번에 오바마와 지지율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습니다. 페일린 돌풍의 한가지 원인은 페일린이 여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에서도 여성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고, 흑인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것과 동일한 심리에서 많은 여성은 페일린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표가 한방향으로 움직였으니 판도가 확 바뀐 것은 당연했죠.

하지만 페일린 돌품은 여성의 심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같은 여성이면서 지명도도 높고 경력도 검증이 된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경선에서 탈락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페일린 돌풍은 그가 미국의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적절합니다.

페일린은 알라스카의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미국인에게 작은 마을 (small town)은 가장 미국적인, 미국의 원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도시에 살다가도 명절만 되면 "시골"로 내려가듯, 미국인에겐 작은 마을이 마음의 고향인 셈입니다. 페일린은 또한 기독교도이고, 가정을 중요시하고, 사냥을 즐기는 등 여러모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백인이니 백인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여성이니 여성표의 반응도 뜨겁죠. 따라서 며칠 사이에 수 없는 스캔들이 드러나며 "검증되지 않은 후보"의 불안한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페일린 돌풍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듯 싶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권자의 반응이 미국의 현실을 무시한 지극히 과거지향적인 태도라는 점입니다. 타임지의 칼럼니스트 조 클라인 (Joe Klein)이 지적하듯 페일린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향한 향수"를 자극하는 존재입니다. 과거에 미국인 백인의 단일민족 국가였고, 농업이 중요하였고, 모두가 기독교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다민종, 다종교국가이고, 지식산업이 중심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대도시나 대도시 근교에 삽니다. 페일린이 알라스카 출신인 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페일린 같은 사람이 미국 본토에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알라스카는 미국의 과거를 잘 유지한 지역이지 미국의 미래를 이끌 지역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인이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로 9/11사태를 겪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끝없는 전쟁을 수행 중이고, 경제는 후퇴하였고, 대부분의 가정은 실질소득이 감소하였고, 독점적인 초강대국의 지위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통받는 상황 속에서 오바마는 "이제 지난 8년간의 잘못을 바로잡고 미래로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그에 비해 페일린은 "지난 8년간 고통스러웠으니... 고통이 없던 100년전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격입니다. 마치 현실에 실망한 한국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듯, 현실에 실망한 미국인들은 미국이 위대한 나라였던 과거로 돌아가기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면 과거로 돌아가자는 표어는 늘 더 큰 실망만 안겨줄 뿐입니다. 많은 기대를 받으며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이 곧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듯, 맥케인과 페일린이 당선된다 하더라도 미국인들은 더 큰 실망을 경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이 미래지향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였는데, 맥케인이 당선된다면 미국의 몰락은 점차 가속화할 듯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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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