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체코에 처음 가본 것은 1994년말 겨울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지내다가 물가 싸다는 소리에 혹해 가보게 되었는데, 당시엔 공산주의 통치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정말로 물가가 싸더군요. 물론 그때 이미 코카콜라를 비롯한 많은 외국 기업이 진출한 상태였지만, 작은 빵 하나가 몇 십원 밖에 안하는 등 생필품은 정말 쌌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지방의 작은 도시를 가보니 공산주의식으로 지은 우중충하고 특징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공산주의 통치시대의 우울한 상황을 상상케 하던 기억도 납니다. 체코는 독일 바로 옆에 있는 나라인데, 서독이 한창 경제발전의 열매를 누리던 80년대에도 체코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공산주의 정부에 눌려 신음하였다는 생각을 해보면, 이들이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마자 자본주의를 전심으로 받아들인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005년에 다시 체코 프라하에 찾아갔을 때, 프라하는 완전한 관광객의 도시로 변해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관광객의 10%는 차지할 정도로 많았죠. 1968년 소련의 억압에 저항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바츨라프 광장 주변엔 맥도날드가 들어섰을 뿐 아니라,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카지노도 영업중이었습니다. 체코인들은 이제 공산주의가 사라졌으니 맥도날드 햄버거를 즐기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할찌 모르지만, 저는 마음 한켠으로 이들이 자본주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내 한복판에 카지노를 허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러했죠.

그러고 몇년이 지난 지금, 동유럽이 경제 위기에 쌓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동유럽인에게 자본주의는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를 과거에 자신들을 억누르던 공산주의의 반대이고, 따라서 절대선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인지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지난 20년간 세계 어느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경제발전에 나섰고, 그 결과 많은 나라가 짧은 시간 내에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외국의 자본을 많이 들여왔습니다.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공장을 세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이는 경제발전기의 한국이 쓴 전략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 국가가 공장을 세운다고 수출이 갑자기 잘 될리는 없지만, 일단 수출이 시작되면 외국에선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들어온 외채로 인해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국민소득도 올라가게 됩니다. 즉, 빚의 증가로 인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제성장 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찌 모르지만, 사실 한국도 무역수지 흑자기조가 정착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후이고, 그 이전에는 거의 늘 무역수지 적자였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이 국가부도를 내지 않고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한 원인은 한국에 들어온 외국 자본이 많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렇게 들어온 외국 자본이 한번에 빠져나갈 경우입니다. 한국은 1997년이 그러했고, 동유럽은 지금이 그러합니다. 동유럽에 대한 투자를 주도한 지역은 서유럽인데, 서유럽 경제도 쉽지 않은 상황이기에 서유럽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자금회수는 곧바로 동유럽 국가들의 집단적인 국가부도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동유럽의 부도는 시장의 심리를 더욱 위축시켜 다른 지역에서도 자금이 이탈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곧 한국 경제도 흔들어 놓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지요.

지금 상황은 동유럽인이 느끼기엔 대단히 억울할찌도 모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그들에게 서방의 지도자들이 찾아가 "너희도 한국처럼 외국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지어 수출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라"고 종용하였고, 이들은 이 말만 믿고 20년간 열심히 자본주의의 모범생으로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고 닥달을 받고, 결국 부도가 나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으니, "이렇게 만들려고 경제발전을 재촉한 것이냐"며 화를 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지요.

자본주의는 상황에 따라 자상한 선생님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빼앗는 폭군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만 보던 동유럽인들에게 이번 사태는 매우 큰 충격이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균형잡힌 태도로 자본주의를 보는 계기가 된다면, 그들에게 좋은 일이겠죠.

P.S. 인터넷으로 유럽의 주요 언론을 체크해봤는데, 신기하게도 동유럽 경제위기를 다룬 기사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더군요. 흥미롭습니다.

P.S.S. 지금 다시 찾아보니 동유럽 관련 몇개 기사가 보이네요. 예를 들어, 르몽드
http://www.lemonde.fr/economie/article/2009/02/21/l-europe-de-l-est-bombe-a-retardement-pour-l-euro_1158606_3234.html#ens_id=1158171

위의 글을 쓸 때는 뉴스 사이클이 어긋났을 수도 있고, 어쨌든 외부의 시각과 유럽의 시각이 틀릴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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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