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ary의 시대

문화 2009/03/19 22:54
얼마전 홍익대 미대가 2013년까지 입시 실기평가를 전면폐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전통 있는 홍대 미대의 실기 평가 폐지 방침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은 "미대가 미술에 재능이 있는지 확인도 안하고 학생을 뽑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대했지만, 정작 미대생을 지도하는 홍대 미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금 행해지는 미대 실기평가는 일정한 규칙에 맞는 작품을 잘 만드는 학생에게 절대로 유리하기 때문에, 틀에 맞지는 않지만 예술성이 넘치는 학생을 많이 뽑지 못하고, 따라서 앞으로 '기능인'이 아닌 '예술인'을 뽑으려면 차라리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시험을 폐지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죠.

하긴 현대 미술관에 가보신 분이라면, "저런 작품은 나라도 만들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현대 미술에서는 데생 능력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번뜩이는 재치만 있다면 뛰어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천안 아라리오 그룹의 김창일 회장은 현대예술작품 수집가로 유명한데, 최근엔 아예 자신이 작품 제작에 나섰습니다. 김회장은 10년전 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데, 전통 미술계에서는 중년에 시작해가지고는 화가가 되기 힘들겠지만, 현대 미술에선 감각만 있다면 실기 능력이 부족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창일 작품 빈센트 반고호

빈센트 반 고호는 데생 능력이 부족해 미술학교 시험에 떨어졌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법을 연마하여 결국 죽은 후에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세기는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가 나타나며 전통적인 미학이 무너지던 시기였는데, 대부분의 미술학교는 고전 미술의 규범에만 매달리다가 반 고호 같은 천재를 못 알아본 것이였죠. 그렇게 본다면 홍대 미대의 실기평가 폐지 결정은 충격적이긴 하지만, 잘 운영하기만 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볼만 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분업이 점차 발달하였고, 20세기에 접어들면 모든 직업과 학문의 영역이 수천 수만 분야로 갈라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직업과 학문이 세분화하면서,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는 대단히 잘 알지만, 남의 영역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매우 편협한 전문가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지요. 이와 반대되는 흐름도 20세기 중반 이후로 나타났습니다.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열정만 있다면 여러 영역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 대해 아는 사람은 시야가 편협하지 않고,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지요. 이러한 사람은 넓게 보는 안목을 지녔다는 점에서 visionary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Visionary가 특히 앞서가는 분야로는 사업계를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컴퓨터에 대해서만 잘 아는 사람이 컴퓨터 회사를 잘 운영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는 기술자라기 보다는 경영자고, 사회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난 visionary입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앞으로 성장할 것을 예견하고 하버드 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웠고, 스티브 잡스는 학비가 너무 비싸 대학을 중퇴했지만, 서체 (calligraphy)에 대해 관심이 있어 서체 과목을 청강했고, 나중에 컴퓨터에 대한 열정과 서체에 대한 지식을 결합해 매킨토시를 만듭니다. 이처럼 넓은 관점이 있다면 궁극적으로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는 visionary의 필요성은 언제보다 더 큽니다. 미국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려면 학부에서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Law school 이나 Medical school 을 나와야 합니다. 즉, 법학이나 의학만이 아니라 다른 공부를 마친 상태에서 법이나 의학을 공부하게 함으로 자연스럽게 편협하지 않은 전문가를 키워내겠다는 생각이지요. 한국에서도 법학전문대학원과 의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하였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제도의 취지와 다르게 학부 전공은 무시하고, 처음부터 전문대학원 입시준비에만 열심이라는 소식이 들리니 안타깝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경제에 대한 글을 올리는 분들을 보자면, 경제를 전공한 분은 극히 드뭅니다. 다른 분야를 전공하였지만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혼자서 공부를 해서 글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런 분들은 오히려 경제만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 현상을 더 넓은 관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울론 하나 이상의 영역을 전문가 수준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넓은 시야를 소유한 visionary에게 이 세상은 가능성으로 가득찬 놀라운 곳입니다. 너무 하나의 영역에 얽매이지 말고 시야를 넓힐 때 새로운 문이 열릴 것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쓰기와 영감  (9) 2009/03/27
직관  (3) 2009/03/21
Visionary의 시대  (4) 2009/03/19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를 꿈꾸며  (4) 2009/03/06
전문가가 되는 길  (10) 2009/01/21
민족문화란 무엇인가?  (3) 2008/02/28

이 블로그를 Hanrss에서 구독하세요-->

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