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성실의 원칙

사회 2009/05/01 05:38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면, 나라마다 사람들이 낮선 사람에게 대하는 자세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바가지 씌우거나 속이지 않는데 비해, 어떤 나라는 조금만 거리가 먼 사람이라면 함부로 속여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죠.

중국은 나와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국가의 좋은 예입니다. 중국에선 기생충이 검출된 김치에서 멜라민이 들어간 분유까지 끊임 없이 음식 안전 문제가 발생하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중국 제품이라면 무조건 불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중국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없애고자 처벌을 강화하는 등 대책을 세웠지만, 워낙 문제의 뿌리가 깊은지라 쉽게 해결이 안되는 듯 싶습니다. 그에 비해 독일은 여러 사람에게 판매하는 음식 등의 위생이 철저할 뿐 아니라 다른 제품도 소비자에게 위험한 요소는 처음부터 제거하고 만들기 때문에 독일 제품 쓰다가 안전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경제 수준의 차이로 돌릴 수도 있지만, 독일과 경제 수준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이탈리아에는 독일과 다르게 사익을 위해 공익을 해하는 집단이 많고, 이는 마피아가 대표적이죠. 예를 들어, 마피아 운영하는 산업 폐기물 처리업체는 돈을 아끼려고 폐기물을 함부로 땅에 쏟아 붇고, 이렇게 해서 오염된 풀을 물소가 먹고 자라기에 물소젖으로 만든 모짜렐라 치즈의 안전성이 의심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공익을 행하는 집단은 독일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죠.

나라마다 공익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원인은 good faith의 존재여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Good faith이란 라틴어의 Bona fides를 번역한 말인데, 우리말로는 "선의"에 가깝습니다. 법을 공부한 분이라면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텐데, 신의성실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은 영어로 acting in good faith입니다. 신의성실은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게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은행에서 1억원을 빌렸는데, 은행이 이자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은행을 괴롭히고자 동전으로 1억원을 만들어 은행 창구에 가서 동전을 뿌려버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나는 1억원을 은행에 돌려줬으니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법의 개념에 따르면 여러분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돈을 갚지 않은 셈입니다. 즉, 상대방을 해하려는 마음으로 부당하게 행동을 한다면, 법은 이를 잘못된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이죠.

어떤 민족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개념을 지니고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들은 어떤 사람을 처음 본다 할지라도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를 인격적인 존재로서 존중하고 그와 원만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가진 사람이 가게를 운영한다면, 그는 손님에게 적절한 가격에 물건을 팔 것이고, 물가를 잘 모르거나,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도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이 없는 민족이라면 낮선 사람이나 불특정 다수를 대할 행동의 기준이 없는 셈이고, 결국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착취하는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성실의 원칙이 없는 사람이 장사를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속여 내 이익을 극대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손님마다 바가지를 씌울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으로 돌아가보면, 중국은 원래 유교의 전통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유교는 고대 농경사회에서 탄생하였기에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농촌에는 잘 맞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생활에는 잘 맞지가 않습니다. 유교에서 도시의 대표적인 경제활동인 상업을 가장 격이 낮은 직업으로 치는 것도 그런 이유죠. 물론 유교에서 강조하는 인, 의, 예, 신 등의 덕목을 잘 갖춘 사람이라면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하며 살겠지만, 이 정도로 유교적 교양이 뛰어난 사람은 어차피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공산주의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유교의 가치가 파괴되었으니 유교적 덕목을 지닌 사람은 더더욱 찾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지난 20여년간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본주의 사상이 민중에게 퍼졌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처음부터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약점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게 잘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족했는데, 유교라는 빈약한 기반 마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때문에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중국인은 남을 해쳐서 나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심이 남았을 뿐, 조화로운 사회를 이룰 이념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러니 싸구려 원료를 써서 소비자에게 해를 끼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그렇게 많은 것이죠.

신의성실의 원칙이 없는 자본주의는 인간 사회를 정글로 바꾸어 놓고 맙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법에 걸리지만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남을 착취해 돈을 벌려는 파렴치한 인간이 판을 치게 되죠. 생각해보면 한국도 유교에서 시작해 자본주의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역사적 배경이 그리 다르지 않고, 따라서 한국에서도 남을 믿는 사람은 찾기 힘들고, 남을 착취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이 많죠.

신의성실의 원칙이 로마법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유럽은 원래 신의성실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유럽은 자본주의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신의성실이라는 원칙도 함께 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이 유럽에서 왔는데, 유럽의 중심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을 찾아보기 힘든 원인은 이탈리아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외세의 침략을 오랫동안 겪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남을 믿다간 나만 손해를 보는구나"하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즉, 침략자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겼으니, 이탈리아 사람들도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리게 된 것이죠. 그에비해 독일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은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키며 남의 나라를 함부로 괴롭히려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핍박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완전히 어긴 예죠. 이렇게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기고 함부로 행동했다가 완전히 망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겠죠.

남이 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상황에서 혼자 어기면 비난을 받지만, 아무도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데 혼자만 지키면 바보가 되기 마련이죠. 그래서 한국처럼 신의성실의 원칙이 무시당하는 나라에서는 남을 믿고 배려하다간 혼자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너무나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고치기 힘들긴 하겠지만, 한국인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따라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한국인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느끼는 답답함과 큰 실망감은 사라지기가 힘들 것입니다.

P.S. 내일은 5월 1일이라 독일에서도 휴일입니다. 저도 분위기를 따라 긴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날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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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