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나이

사회 2009/05/06 05:24
몇년 전 제프리 삭스가 쓴 "빈곤의 종말"(The End of Poverty)을 읽을 때였습니다. 제프리 삭스는 애덤 스미스를 몇 번 언급하였는데, 그때 마다 그의 태도에서는 깊은 존경심이 묻어나오더군요. 그때까지 제게 애덤 스미스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경제학의 창시자였을 뿐, 저와는 상관 없는 사람일 뿐이었죠. 하지만 제프리 삭스 같이 뛰어난 경제학자가 존경심을 보일 정도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국부론(The Wealth of the Nations)를 읽게 되었습니다. 읽다 보니 정말 뛰어난 통찰력이 가득 담긴 책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많고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아서, 읽다가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이 좀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작년 가을 이후로 경제 공부를 많이 해서인지 이제는 내용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읽다보니 이 책이 다른 경제학자에게 미친 영향도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예를 들어 막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은 애덤 스미스가 먼저 꺼낸 이야기더군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으면 많은 내용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 1-2년 사이에 지루하게 느껴지던 책이 재미있고 유용하게 느껴지도록 변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읽을 때가 안되면 지루한 책이라도, 읽을 때가 되면 재미있게 느껴지는 법이죠. 우리는 흔히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을, "늦기 전에 공부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아직 공부할 때가 아니라면 공부를 안해도 된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공부할 때에 공부를 안 해도 문제지만, 공부를 안 할 때에 공부를 한다면 괴롭기만 하고 배우는 것은 없기에 문제가 크다는 말이죠.

어제 언급한 Boys Adrift에 보면, 요즘 미국의 젊은 남자들이 의욕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공부하는 나이가 너무 앞당겨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미국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유치원에서도 숙제를 내주는 등 이미 만 다섯 살 정도 부터 실질적으로 학교 공부가 시작됩니다. 문제는 많은 남자 아이들은 이 나이에 공부를 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기에 유치원에서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유치원 교사는 부모에게 "아이가 ADHD(집중력결핍과잉행동장애)인 것 같다"고 말하고, 부모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ADHD 치료제를 먹게 되는데, 이러한 치료제를 어린 나이에 먹으면 두뇌가 영향을 받아 평생 의욕을 잃은 채로 살 가능성이 커집니다. 만약 ADHD 치료제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수업 시간에 뛰어 놀다가 자꾸 혼나게 되는 아이는 '학교는 나를 괴롭히는 곳, 공부는 지루하고 참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평생 공부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아이가 철이 들때까지 학교에 안 보내면 됩니다. 더도 말고 초등학교 입학때 까지만 기다린다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성장해서 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고, 따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기에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부유한 가정은 유치원을 건너뛰고 초등학교 부터 학교를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가난한 가정은 맞벌이를 해야 하기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 밖에 없고, 이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죠.

유치원은 원래 19세기의 교육가인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어린 아이들이 놀이와 참여활동을 통해 배우고 자라는 장소로 만든 기관입니다. 꽃밭에서 꽃이 자라듯,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정원이라는 뜻에서 아이들의 정원(Kindergarte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죠. 그런데 경쟁을 강조하는 21세기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유치원 교육이 변질되어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서 마음껏 놀지 못하고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도 부모들의 극성 때문에 유치원에서 불법적으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죠. 결국 이렇게 지나치게 공부를 일찍 시키면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은 공부에 대해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여자 아이들은 유치원때부터 이미 어른의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데 능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어른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법이죠).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공부로 인해 심성이 황폐해졌는지 보려면 오마이뉴스에 나온 "피 묻은 칼 들고, 바다위 절벽에 서고"라는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몸은 아이지만 어른의 고민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의 처지에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영어 조기 교육도 그렇습니다. 외국어를 조기에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도 아이가 어느 정도 외국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를 봐가면서 해야겠죠. 무턱대고 아이에게 외국어를 강요한다면 아이는 "외국어는 곧 괴로움"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장기적으로 볼 때 외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저는 다행히도 어릴 때 부모님이 제게 외국어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는데, 그래도 한 번은 부모님이 카세트 테이프와 책 등으로 구성된 외국어 학습교재를 가져오신 일이 있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테이프를 몇 개 들어봤지만,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만 나오고 해서 어린 마음에 참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그 학습교재는 별로 쓰지도 못한 채 버려졌지만, 그 덕에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배웠고, 그래서 지금은 외국에서 영어를 쓰며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릴 때 부모님이 제게 영어 교육을 강요했다면, 저는 평생 영어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품고 살아야 했겠죠.

오늘은 한국에서 어린이 날이었죠. 한국 부모의 자식 사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별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지나쳐 "자녀 잘되라고"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의 강요가 아이에게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죠. 특히 아이에게 충분히 아이로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면, 아이는 평생 활용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이라는 큰 자산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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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