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객관화

문화 2009/06/18 07:49
최근에 피자 조리법을 배우기 위해 recipe 사이트를 다니다 보니 조리법을 대하는 서양 사람들의 태도가 한국 사람들의 태도와 다르다는 사실이 눈에 띄더군요. 한국인은 조리법이 대충의 방법을 설명하는 지침일 뿐, 음식의 맛은 요리하는 사람의 경험과 능력이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국인만이 이해하는 '손맛'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생각과 관계가 깊죠. 그에 비해 서양인들은 조리법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고, 따라서 정확한 조리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합니다. 미국 시트콤 사인펠드에 보면 일레인이 자신에게 망신을 준 수프 요리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조리법을 공개해서 그가 수프 집 운영을 포기하도록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코미디라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인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요리를 조리법으로 환원(reduction)하는 태도의 예라고 할 수 있죠.


기술을 객관화하는 서양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영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Paint by Number 세트엔 작은 부분마다 번호가 쓰인 종이와 물감이 들어 있는데, 번호에 따라 물감을 칠하기만 하면 누구나 명작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의 객관화가 규격화, 상업화로 연결된 예죠. 그러고 보면 붓질 몇 번으로 훌륭한 풍경화를 쓱쓱 그려대던 밥 아저씨(Bob Ross)는 정말로 자신이 가르치는 방법을 따라 하면 누구나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 비해 기술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전통이 강한 한국인들은 밥 아저씨가 아무리 "참 쉽죠"를 연발하더라도, "몇 년간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저런 그림은 절대 그릴 수 없다."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죠.


서양인이 지식과 기술을 객관화하는 경향이 강한 데 비해,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인간과 기술을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과거엔 무술이든 의학이든 기술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스승에게 찾아가 청소부터 시작해 의미 없어 보이는 잡다한 일을 한참 배운 후에야 본격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죠. 이는 스승이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인간성을 확인하고, 귀찮은 일을 시킴으로 성품을 훈련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면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은 이러한 동양의 교육관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에 비해 서양의 교육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돈을 내고 지식을 주고받는 계약관계였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관계를 보는 관점은 고등교육의 관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전공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공부하러 왔는데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불만이 많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현실이기에 이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죠. 그에 비해 서양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의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교수에게 지식을 얻으려고 학비를 냈기에 지식을 얻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식이 인간의 한 부분이라면, 인간성이 온전히 발달할 때 지식 또한 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의 사대부는 지식과 함께 덕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에 비해 지식이 인간성과 분리된 영역이라고 보는 서양에서는, 인간성이 나쁜 사람이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는데 관대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돈만 밝히는 궤변가들"이라고 비난한 소피스트가 당시 철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지식을 객관화하는 문화는 지식을 문서로 만드는데 힘쓰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문서를 만들어야 다른 사람도 지식을 활용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에 비해 지식을 인간의 한 부분으로 보는 문화는 관계를 통해 지식을 전수하기 마련입니다. 경험 많은 사람을 "사수", 경험이 없는 사람을 "부사수"로 놓고 사수가 부사수에게 실무를 가르치는 풍습은 관계를 통한 지식 전수의 예죠. 이러한 사제 관계가 최고로 발전하면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다른 사람은 모두 의아해했는데, 가섭존자만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는 마음으로 연결된 긴밀한 사제관계의 좋은 예죠.

한국인이 지식을 객관화하는 경향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한가지 문제는, 한국인이 매뉴얼을 잘 만들지도, 읽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어차피 매뉴얼을 만들어봤자 제대로 지식이 전달되질 않는다고 생각하니 힘들게 매뉴얼을 만들길 꺼리고, 배우는 사람도 매뉴얼을 보고 배우느니 부딪쳐 배우겠다는 생각이 강하니 매뉴얼이 있어봤자 별 효과가 없죠. 한국인이 지식을 객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한 한국인에게 외국인들이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도 가르쳐줄 내용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하긴 하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표현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한국의 대기업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서양 기업들의 영향을 받아 업무를 매뉴얼화하는 예가 늘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흐름이 더욱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은 지식을 객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작은 지식이라도 글로 객관화한다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자산이 되는 법이죠. 하지만,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직접 와서 배워라."고 한다면 소수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지식을 인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관점이 전 인격적인 교육의 기반이 된다는데서 장점이 크지만, 익명의 다수가 만나는 인터넷에선 지식의 객관화 작업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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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