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화는 내부의 요소를 포괄하는 하나의 단위고, 따라서 문화의 한 요소만 다른 문화에 옮겨 놓으면 기존의 문화와 어울리기 쉽지 않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예를 들어, 김치는 밥이나 라면과 함께 먹어야 제맛이지, 스파게티나 빵 등 외국 음식과 먹으면 무언가 잘 어울리지 않죠. 그런데 서양 음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 김치도 중국 음식이나 일본 음식과는 나름대로 궁합이 맞습니다. 실제로 김치를 반찬으로 내놓는 중국 음식점도 많죠. 물론 이는 한국인이 먹는 중국 음식이 한국문화에 맞게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먹는 피자도 한국문화에 맞게 변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피자와 김치를 함께 먹는 사람은 드뭅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그럼에도 영어를 잘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은 1-2 년만 지나면 일어를 능숙하게 합니다. 심지어 별로 고생하지 않고 일본 드라마, 만화를 보다가 저절로 일본어를 익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에 비해 헐리웃 영화, 미국 드라마를 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간의 거리가 달라서 생깁니다.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 등 역사를 공유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밀접합니다. 그에 비해 미국이나 유럽 등 최근에야 교류가 시작된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거리가 멀죠.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음식, 언어, 사고방식 등의 영역에서 호환성의 수준에 영향을 미칩니다. 즉,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의 음식은 입맛에 잘 맞고, 언어도 배우기 쉬우며, 사고방식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에 비해 문화적으로 먼 나라의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고, 언어도 배우기 어렵고, 사고방식도 이해하기 어렵죠.

미국은 우리가 대중문화를 통해 늘 접하기 때문에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문화적으로 한국과 대단히 거리가 먼 나라입니다. 이는 미국과 한국의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따라서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면 대단한 문화충격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인사회 바깥으로 나가길 꺼리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영어도 잘 늘지 않습니다. 반대로, 교포 2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라기 때문에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죠. 이러한 교포 2세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한국어를 못하니까 속상하겠지만, 자녀 입장에서는 한국어가 너무나 먼 문화의 일부분이기에 쉽게 배우기가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가까운 문화가 모이면 문화권이 형성됩니다.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을 쓴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권을 문명(civilization)이라고 불렀고,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쓴 아놀드 토인비는 이를 사회(society)라고 불렀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비슷하죠. 한국은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유행하는 패션은 한국에서도 유행하고, 한국에서 인기를 끈 드라마는 중국에서도 인기를 끕니다. 이른바 "한류"도 한국의 문화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이고, 따라서 한국과 문화적으로 먼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류가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죠.

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인기를 끄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문화권에 대한 각성의 한 부분입니다. 즉, 과거엔 미국, 영국 등 한 나라가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문화권 내에서 영향력이 큰 나라들이 등장하는 추세죠. 예를 들어, 인도 주변의 국가들(스리랑카, 네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은 인도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의 대중문화를 공유합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선 나이지리아의 영화가 영향력이 있습니다.

문화권이 중요해지면서 음식문화도 문화권 별로 영향을 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에 노르웨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노르웨이 전통음식이 사라지지 않았느냐?" 라고 물었더니 "노르웨이 전통음식이 사라지는 것은 맞는데, 그 빈자리를 피자, 스파게티 등 이탈리아 음식이 채우는 중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지난 몇십 년간 유럽 문화권에서는 스파게티와 피자가 엄청나게 중요한 음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유럽 문화권 바깥에서는 이탈리아 음식의 영향력이 여전히 미미하죠.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화권의 세력화는 20세기 말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19세기엔 민족이라는 단위가 중요했고(나폴레옹 전쟁과 이탈리아의 통일이 좋은 예죠), 20세기엔 이념이라는 단위가 중요했습니다(1980년대만 하더라도 민주진영에 속한 한국은 공산진영에 속한 중국을 먼 나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는 급격하게 문화권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이는 아랍 문화권과 유럽 문화권의 충돌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죠.

문화권이라는 단위의 부상은 한국인에게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이러한 나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어떻게 국가적 유익을 극대화할지 고민해야겠죠. 과거엔 한국이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컸지만, 최근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과 일봉에서 인기를 끈 데서 알 수 있듯, 한국의 문화적 역량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강대국에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자신감 있게 역량을 집중한다면, 특정한 영역에서만큼은 한국이 동아시아를 이끄는 나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문화권 중심의 시대라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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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