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권한

문화 2009/08/11 05:44
제가 1999년에 LA를 방문했을 때 친척들로부터 들은 일입니다. 당시 부통령인 알 고어가 사촌 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왔는데, 학생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고 싶었지만, 교장이 허락을 안 해줘서 교사들만 만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부통령이면 대통령 다음 가는 국가의 권위자인데, 일개 교장이 허락을 안 한다고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시로는 제게 매우 충격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유럽에 살다 보니 당시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권위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올라 어떤 권위를 행사한다는 말은, 특정한 일을 해내기 위한 수단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권위가 아니라 직무이고, 모든 직위에는 직무를 규정하는 job description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Job description은 대통령이나 사장 같은 최고 책임자뿐 아니라 전산 담당자, 비서, 청소부 등 조직 내의 모든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즉, 조직에 속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job description에 나온 대로 일을 해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라도 구체적인 job description을 따라 일하는 사람의 고유 영역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서양식 리더십입니다. 그러니 부통령이라도 "학생들에게 최고의 학습환경을 조성해준다."는 job description에 따라 일하는 교장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수 없죠.

그에 비해 한국식 권위자는 권위와 권위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이는 서양에서는 지식을 객관화하는 데 비해, 동양에서는 지식이 곧 지식을 소유한 사람과 동일시되는 현상과 비슷하죠). 따라서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책임자가 된다는 말은 "아랫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릴 권리를 갖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권위자는 job description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자기가 알아서 적절하게 조직을 이끌어 가면 됩니다. 또한, 권위자가 곧 권위이기에, 권위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랫사람에게 사적인 업무를 시켜도 대부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수들이 대학원생들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군대에서 장교가 사병에게 개인적인 업무를 시키는 경우가 그러한 예죠. 이처럼 아랫사람에게 직업 업무와 관계없는 일을 시키는 경우는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양인의 머릿속에서 지도자는 업무의 영역에 대해서만 권위가 있지, 업무 외의 영역에 대해선 일을 시킬 권위가 없기 때문이죠.

한국의 지도자는 서양의 지도자와 다르게 아랫사람에게 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고 권위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아랫사람 고유의 영역을 잘 존중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조직 내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문서가 아닌 지도자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그 영역에 대해서도 내가 최고 권위자다."라고 주장한다면, 밑의 사람들은 그냥 따라야 하죠. 그에 비해 서양은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아랫사람의 영역을 침범했다면 객관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얼마 전 하버드대학의 헨리 루이스 게이츠 교수가 자기 집에 들어가다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은 경찰이 또 인종차별을 저질렀다고 분개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경찰이 어리석게 행동했다."(acted stupidly)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이 엄청나게 반발했고,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내가 좀 다른 말을 썼어야 했다."(I could've calibrated those words differently)며 거의 사과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물론 이를 백인 유권자를 겨냥한 제스쳐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어떻게 체포할지는 경찰이 결정할 문제이고,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이를 직접 비난한 것은 월권행위입니다. 따라서 인종 문제를 떠나서,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해야 맞는 일이죠. 조직의 관점에서 봐도,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수반이고 지역 경찰(local police)은 연방정부 소속이 아닙니다. "국가의 어른"이라고 아무 영역에 대해서나 코멘트를 하는 한국과 다르게, 미국에선 대통령이라도 연방정부 바깥의 조직에 대해 간섭을 한 것 자체가 잘못이죠.

서양식 권위자와 일해보면 편하긴 한데, 정을 느끼긴 어렵습니다. 철저하게 정해진 업무의 영역 내에서만 만나고, 그 이상의 관계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고, 아랫사람의 영역을 인정해 준다는 점은 장점이기도 합니다. 동양의 권위 개념은 유교에 바탕을 두었는데, 유교라는 이념이 무너지면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유교가 무너진 이후에 자란 젊은 세대는 전통적인 권위의 개념에 대해 많이 답답해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세대 간에 서로 이해하고,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권위자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겠죠.

P.S. 저는 오늘부터 3주 휴가이긴 한데, 지난달에 너무 자주 글을 쉬어서 휴가 기간 전체 동안 블로깅을 쉬기는 뭣하고, 8월 마지막주만 한 주 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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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