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자본

사회 2009/09/16 04:54
얼마 전 여기 있는 DVD 라이브러리에 Good German이라는 영화가 보이길래 제목에 끌려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채 보게 되었습니다. 흑백으로 된 이 영화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처럼 2차대전 직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였습니다. 이 영화는 최근에 만들어졌지만, 좌우로 넓지 않은 비율의 화면이나 배경음악의 분위기 등이 1940-50년대의 영화를 연상케 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 영화는 1940년대에 쓰던 촬영 장비만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그래서 줌렌즈나 무선 마이크 등도 쓰지 않았다는군요.

과연 왜 이렇게 기이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의아했는데, 스티븐 소더버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라는 영화로 화려하게 데뷔했고, 최근엔 Ocean's Eleven, Twelve, Thirteen으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재능 있는 감독입니다. 하지만, 그는 상업적인 성공만 추구하지 않고, 실험적인 영화를 꾸준히 발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 카프카 등 대중의 취향과 거리가 먼 작품을 만들어 거의 잊힌 감독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그가 감독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흥행공식에 맞게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기보다는, 연출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을 골라 만들었던 것이죠. 이러한 수련 기간을 10년 이상 보내고 난 후, 그는 에린 브로코비치로 화려하게 재기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회복하고 나서도 그는 대중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작품을 번갈아가며 만들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키워가는 중입니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가 만든 실험적인 작품은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2002년에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로 만든 Full Frontal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단의 혹평을 들어야 했죠. Good German도 크게 성공적인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험 작을 만드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결과이지요. 실패가 싫다면 자신이 잘 만드는 영화, 대중이 좋아할 영화만 만들면 될 것입니다. 소더버그가 실험 작에 계속 도전하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는 시트콤 Seinfeld가 큰 성공을 거둔 후에도 계속해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했습니다. 그는 이미 돈을 매우 많이 번 상태였기에 공연으로 돈을 벌 필요는 없었지만, 관객과 호흡하면서 코미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무대에 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늘 하던 레퍼토리를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새로 개발한 소재로 공연할 때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를 소재로 다룬 Comedian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무대에서 새로운 소재로 공연하다 말이 막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코미디언이라고 할만한 사인펠드가 관객들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매우 애처롭지만, 그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실패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죠.

사업을 하려면 자본이 필요하듯, 인생에도 자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자본을 쓰면 돈을 벌고, 직위를 얻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자본을 소모하기 만 하다 보면 "밑천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밑천이 떨어진 사람은 지금까지 해온 일은 잘하지만, 아무런 창조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적응하지 못하고 도퇘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생을 장기적으로 본다면 당장 인생의 자본을 써서 돈을 벌 생각만 하지 말고, 적절하게 자본의 소비와 축적을 조절해야 하죠.

인생의 자본을 축적하려면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야 합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받는 자극이 창조성을 촉발하고, 여기서 새로운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죠. 특히 젊은 시절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인생의 자본을 축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너무 인생의 자본을 소비만 한다면, 얼마 되지 않아 발전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길게 본다면, 인생의 자본 축적이야 말로 젊은이가 힘써야 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P.S. 저는 스위스에 잘 다녀왔습니다. 텐트에서 자느라 추위에 떨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오는 길에 이탈리아에 있는 밀라노에 들러 피자를 먹은 것도 좋았습니다. 오는 길에 길을 잃어 새벽 한시에야 도착하고 보니 다음날 아침 렌터카를 정해놓은 시간까지 돌려주기가 쉽지 않더군요. 게다가 손님도 한 명 와서 거기도 신경 써야 했고, 와보니 일주일간 밀린 일도 쌓여 있고... 등등의 이유로 어제는 하루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이번 주 일요일부터 제가 일하는 센터에서 3개월간 신앙 훈련과정이 시작되고, 제가 그 과정의 진행을 책임지게 됩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배우면서 하느라 좀 정신이 없네요. 이번 주는 정상적으로 블로그 운영을 할 생각이지만, 훈련이 시작되고 나면 글을 매일 올리기는 힘들 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부터 12월 중순까지는 글이 자주 올라오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고, 그 이후엔 다시 정상적으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기의 남성  (5) 2009/09/19
조용한 죽음  (3) 2009/09/17
인생의 자본  (2) 2009/09/16
모험심과 책임감  (3) 2009/09/02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3) 2009/08/19
이발소의 변천사  (7) 2009/08/14

이 블로그를 Hanrss에서 구독하세요-->

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