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탄생

정치 2009/11/23 07:02
얼마 전 제가 일하는 곳에서 베를린으로 견학을 다녀왔습니다. 총리관저(청와대와 비슷한 곳이죠)에도 가보고, 국회의사당도 방문하면서 독일의 정치체제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독일 국기가 유럽연합 국기가 함께 걸려 있는 모습이 마치 독일이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 보이더군요. 하긴 최근 유럽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뽑히는 등 유럽 통합의 강도가 강해지는 중이니, 이런 식으로 간다면 텍사스 공화국이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듯, "독일"이라는 나라가 "유럽연합"이라는 시스템에 사실상 흡수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죠.

한반도에는 "국가"의 개념이 오래전 부터 존재했지만, 유럽은 국가라는 개념이 생겨난 지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nation이 국가를 뜻하기도 하고, 민족을 뜻하기도 하고, 국민을 뜻하기도 하는 등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국가라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부족(tribe)만이 존재했습니다. 부족은 보통 오늘날의 국가보다 훨씬 작아서 한 지역에 여러 부족이 존재하고, 이들은 많은 싸움을 벌였죠. 하지만, 로마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작은 부족인 라틴족이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결국 지중해 주변을 모두 정복하면서 유럽 대부분은 로마제국에 흡수됩니다.

로마제국이 붕괴하면서 각 지역엔 새로운 정치조직이 들어서는데,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지도자가 드물었기에 보통 하나의 민족은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나뉘게 됩니다(민족은 보통 언어와 문화가 같습니다. 부족은 언어와 문화가 같은 사람 중에서도 내가 진정으로 나와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게르만족은 한 민족이지만, 그 속에는 반달족, 동고트족, 서고트족, 프랑크족 등 다양한 부족이 존재했죠). 특히 로마제국에 속하지 않았기에 부족 고유의 전통이 강하던 라인강 동쪽 지역과 로마제국 이후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인 이탈리아 지역엔 수많은 왕국, 공국이 생겨나죠.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민족에 속하는 이웃 부족들을 경쟁자로 여겨 적대시했고, "우리는 한 민족이니 힘을 합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예를 들자면, 중세시대에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은 주도권 다툼을 벌였고,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 등 외세를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찾아오면서 민족에 대한 각성이 시작됩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를 통일할 군주"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죠. 사람들은 점차 하나의 민족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현실에 대해 반성하고, "하나의 민족을 하나의 정치단위로 묶자!"는 주장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표현된 지역이 바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나 독일과 다르게 작은 단위의 국가가 난립하지 않았기에 통합이 쉬웠고, 르네상스 이후로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하였기에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전파한다며 주변국에 전쟁을 일으키자 주변국가들은 나폴레옹의 군대와 싸우면서 민족주의에 눈뜨게 됩니다. 즉, 민족의식이 확실한 프랑스인들과 싸우다 보니 자신들도 민족의식이 싹튼 것이었죠. 이렇게 해서 19세기에 들어서면 서유럽은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이는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정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장 늦게 이러한 흐름에 합류한 국가는 이탈리아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워낙 많은 지역으로 나뉜데다가 교황령이 반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서 통일이 어려웠지만, 가리발디 장군이 혁명군을 지휘해 교황령을 비롯한 모든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 통일을 이룩해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통일이 늦어졌기에 지금도 지역적 차이가 많이 존재하죠.

유럽에서 싹튼 근대적 민족의식은 19세기 유럽의 팽창을 따라 전 세계로 퍼지고, 지금은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민족주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에티오피아를 제외한다면 19세기까지 민족국가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지만, 유럽에서 독립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우리는 나이지리아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우간다 사람은 "우리는 우간다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등 국가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식이 빠르게 성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민족의식의 성장은 유럽을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몰아넣습니다. 각국이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뭉치자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낫다"라는 경쟁심이 싹트고, 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러한 아픔을 겪고 난 유럽은 민족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였고, 민족이 아닌 유럽을 공동체의 단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태도의 표현이 바로 유럽연합이죠. 이제 유럽연합 내의 대부분 지역에선 같은 통화를 쓰고, 여행을 할 때 여권이 없어도 됩니다. 거의 한 나라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이죠. 이처럼 유럽이 통합된 상황에선 전쟁을 할 수가 없겠죠. 결국, 유럽은 전쟁을 막고자 민족주의를 약화하고 로마제국식의 거대 정치체제를 받아들인 것이죠.

유럽의 통합이 강화하면서, 한국에서도 "한중일도 통합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민족의 경계가 뚜렷하기에 유럽보다 민족주의가 훨씬 강합니다. 유럽의 민족국가들은 역사가 겨우 100-200년 정도지만(물론 그전에도 유럽의 국가들은 존재했지만, 이러한 국가는 "민족국가"라고 부르지 않죠), 한국은 통일신라 이후로 천 년이 넘도록 단일 국가가 유지되었고,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지가 400년이 넘었습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여러 민족이 함께 살기에 유럽과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중국의 한족이 만주족의 지배를 떨쳐낸 것은 19세기 유럽 민족주의의 영향이 큽니다), 한족 중심의 사고인 중화주의의 전통이 강하기에 주변국과 쉽게 연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역사가 짧은 유럽은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거대한 기구를 받아들였지만, 같은 현상이 동아시아에서 반복될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역사가 다르니 의식도 다르기 때문이죠.

P.S. 제가 다음 주에 1주일간 미국을 다녀옵니다. 주말이 끼기 때문에 글을 올리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어쨌든 12월 중순이면 지금 맡은 일이 끝나기 때문에 12월 말 부터 글을 좀 더 자주 올릴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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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