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로부터 이익 집단의 개념을 물려받은 유럽은 이익에 따라 작동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근대 국가가 그것이죠. 근대 국가는 부족이나 민족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부족이나 민족은 혈연 공동체이고, 집단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가 전제됩니다(흑인들은 이러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하기에 처음 만나도 서로 "brother, sister"라고 부르죠. 백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국가는 혈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구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인위적인 조직이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국가를 예술 작품에 비유한 것(Der Staat als Kunstwerk)은 이러한 국가의 인위적 성격 때문입니다.

국가는 인위적 조직이기에, 국가는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이 부족한 독일은 터키인을 많이 받아들였고, 결국 독일에 사는 터키인은 독일인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터키인이 독일인이 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관점에서는 가능하죠. 또한, 국가의 개념을 쓰자면 같은 민족도 손해를 끼치면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한국인들이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에 따르는 비용을 이유로 통일을 꺼리게 된 것이 좋은 예죠.

이처럼 국가의 개념이 공동체에서 이익 집단으로 발전하는 현상은 유럽 역사의 독특한 산물이고, 다른 지역에선 국가를 이익 집단이 아닌 공동체의 연장으로 보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중국이 좋은 예죠. 중국의 정치사를 지배한 유교 이념은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봅니다. 유교에 따르면 가족에서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듯 사회에서도 남에게 예의를 갖추고, 친척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 행동하듯,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이처럼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보면 가족이 구성원에게 하는 요구를 국가도 개인에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의 요구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효도이죠. 효도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부모님께 잘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를 국가에 적용하면 충성이 됩니다. 충성은 국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려는 태도이죠.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묶은 충효사상은 가족의 개념을 국가로 확대하는 열쇠였고, 유교문화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충효사상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모델에 기초한 국가의 개념은 국제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로 보자면 두 나라 사이에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가 성립합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군신 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성립이 되겠죠(군신 관계의 핵심인 충은 곧 효와 병행하는 개념이기에 군신 관계도 일종의 가족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군사부일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의 모델로 이해하면 가족 관계의 덕목이 국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어버이처럼 섬겨야 하고,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효심 깊은 아들이 칭찬받듯, 큰 나라를 섬기려는 태도(이른바 사대주의)는 유교에서 마땅히 칭찬받아야죠.

하지만,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가 아닌 이익 관계로 본다면 나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좋은 나라, 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나쁜 나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나라를 가까이하고, 해로운 나라를 멀리하면 될 뿐이죠. 이러한 관점은 유교에선 지극히 불손한 태도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용 노선을 추구하던 광해군의 정책은 유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들이 보기에 중국을 지배하는 명나라는 우리에게 형과 같은 나라이고, 명나라를 돕지 않으려는 태도는 가족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은 미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은 미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미국은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을 대할 때 손익의 관계에서 보는 태도는 매우 불손하기 때문이죠. 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미국이 감동할 정도로 미국을 도와야" 마땅합니다(물론 이와는 다르게 한국이 미국을 돕는 것이 한국에게 이익이기에 미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앞의 주장과 결론을 같지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다르기에 다른 입장으로 봐야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국이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충격 그 자체였죠.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란 젊은 세대 중에는 국제 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들은 명분에 얽매어 실리를 잃는 외교는 어리석어 보일 뿐이죠. 이처럼 국가라는 집단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국제관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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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