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개혁

정치 2010/06/03 16:44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인터넷에선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의 단일화 거부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오세훈 후보가 한명숙 후보에게 신승을 거둔 이번 선거에서, 만약 노회찬 후보가 자진하여 사퇴해서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면 한명숙 후보가 넉넉하게 당선이 되었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러한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는 것이죠. 이러한 논쟁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벌어지는데, 조지 W. 부시가 알 고어를 힘겹게 이긴 2000년 미국 대선 때도 알 고어 지지자들이 녹색당 후보 랄프 네이더를 엄청나게 비난했고, 극우파 장-마리 르팽이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꺾고 결선에 진출한 2002년 프랑스 대선때도 알렛 라기에를 비롯한 군소 좌파 후보들에 대한 투표가 잘못이었다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노회찬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논의야 이해하기 쉬우니, 노회찬 후보의 사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생각해 봅시다. 이를 위해선 진보와 개혁이라는 두 가지의 정치적 견해를 이해해야 합니다.

진보와 개혁은 여러모로 비슷하기에 혼동하기가 쉽습니다. 진보나 개혁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보호, 그리고 시장의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등을 중요한 목표로 내세우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누가 진보이고 누가 개혁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보는 현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따라서 극단적으로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현 체제를 인정하고 문제만 보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개혁과 차이가 납니다. 즉, 진보는 개혁보다 훨씬 강도 높은 변화를 요구하는 셈이죠.

진보와 개혁의 차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서도 구분됩니다. 신자유주의는 20세기 말에 들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한 흐름인데, 개혁 정치인 중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복지정책을 강화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 등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개혁 정치인의 대표죠. 하지만, 진보 정치인이라면 자본주의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형태인 신자유주의를 엄격하게 부인합니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은 모두 개혁에 속합니다. 미국의 녹색당 등은 진보에 속하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권력을 잡았거나 잡을 가능성이 큰 정당은 보수거나 개혁입니다. 진보가 권력을 잡았거나 잡을 가능성이 큰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이는 진보가 원하는 만큼 극단적으로 사회를 바꿀 용의가 있는 선진국 국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진보는 소수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정치세력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크지는 않더라도 정치를 건전하게 하는 소수의 목소리 역할을 하는 셈이죠.

한국은 군사독재와 싸우는 수십 년간 진보와 개혁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진보와 개혁이 자연스럽게 분리되었죠.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 2004년 민노당의 원내진출은 진보가 드디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진보와 개혁을 혼동하였고,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개혁 정당은 민노당, 그리고 진보신당에 단일화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개혁 정치인들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작게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을 "진보"라고 설명했고, 이는 유시민 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진보 정당이 보기에 진보와 개혁은 전혀 다른 두 사상이고, 따라서 개혁 후보가 당선되어도 진보의 이념 실현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독재의 망령이 꿈틀대는 한국에서 이념을 가릴 것 없이 잘못된 권력과 싸워야 할 필요는 분명하고, 그렇기에 심상정 후보도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지만, 길게 본다면 진보는 개혁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니라 진보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진보 진영 내부에서 높습니다. 노회찬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완주는 이러한 진보 진영의 생각을 반영했다고 봐야겠죠.

개혁이 진보보다 훨씬 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의 bear hug는 진보에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좋아야 성립되지 일방적인 구애는 성희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개혁 정당이 보수 정당을 완벽하게 이기지 못한 선거 결과를 놓고 볼 때 개혁주의자들은 답답할 수 있겠지만(저도 개혁주의자로서 많이 답답하게 느낍니다), 개혁과 진보를 다르게 보는 진보주의자의 관점에서 개혁과 진보의 무조건 통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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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