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띕니다. 과거에 대부분 사회에선 부모가 자녀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선 부모, 특히 아버지가 윗사람이 되어 아랫사람인 자녀를 마음대로 통제했죠. 가장(Pater Familias)이 가족에 대해 생사여탈권(ius necandi)을 지녔던 로마 사회는 이러한 좋은 예입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군사부일체라 하여 아버지는 임금과 스승에 비견되는 권위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유럽이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논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는 장자끄 루소였죠. 루소는 에밀, 또는 교육에 대하여(Émile ou de l'éducation)에서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게 보고, 억압적 교육으로 이러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망가트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인간을 본능으로부터 단절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던 전통적인 교육관에 반기를 든 것이죠.

루소 등이 주창한 새로운 교육이론은 아이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전까지 아이들은 "철부지"고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어른" 처럼 존중되어야 할 "어린이" (아이를 존중하는 이 표현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20세기에 들어서야 탄생합니다)이자, 어른은 잊어버린 선한 본능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지닌 어른의 스승이지요. 그러니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말이 나와도 당연한 일이죠.

아이가 이처럼 귀중한 존재라면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도 자녀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녀의 속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본성을 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통해 파괴하면 안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새로운 자녀 교육 이론은 권위에 대해 부정적인 진보계통에서 큰 인기를 끕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부모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자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데 비해, 진보적인 가정에선 부모가 자녀를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배우가 되고 싶은 아들의 꿈을 억눌러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보수적인 부모를 보며, 진보주의자라면 '나는 저렇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평등하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친구 관계를 모델로 삼을 것입니다. 친구는 능력과 지위가 평등한 사람이 만나 서로의 호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하는 관계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 중엔 "친구 같은 부모"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기 때문에 친구 같은 부모가 되는 데 대해 큰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친구 같은 부모"란 멋있는 말이긴 하지만, 실천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친구는 평등한 관계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와 부모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 평등하다면, 갓난아기도 가사를 돌보고, 밖에 나가 돈도 벌어와야겠죠. 그리고 부모가 아기 기저귀를 갈아준다면 아기도 부모의 빨래를 대신 해 주는 식으로 보상해야 마땅하죠.

자녀가 자라 학교에 갈 나이가 된다고 할지라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완전히 평등해 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교육 경쟁이 심한 사회에선, 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녀는 공부하고, 부모는 돈을 벌어와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나 부모의 투자나 결국 유익은 자녀가 얻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자녀는 자신을 위해 살고, 부모도 자녀를 위해 살기 때문에 부모 자녀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감정적인 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돈과 마찬가지로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하며 삽니다. 그런데 부모 자녀 관계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감정을 쓰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감정을 얻으며 삽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랑 같이 있길 원하고, 부모는 자녀가 달려들면 (처음에는 좋겠지만) 결국 힘들어서 거리를 두기 마련이죠. 자녀가 부모한테 "놀아줘~"하고 조르기는 해도, 부모가 자녀한테 "놀아줘~"하고 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누가 감정을 벌고, 누가 감정을 쓰는지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한쪽을 돕는 관계는 평등할 수가 없고, 친구의 모델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가 "친할"(즉, 감정적으로 가까울) 수는 있지만,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재정적 부담을 평등하게 지는 친구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부담은 대부분 부모 몫이기 때문이죠. 또한, 판단력이 떨어지는 어린 자녀를 올바르게 이끌 책임은 부모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자녀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인생을 망칠 위험이 있다면, 부모는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해야겠죠. 친구라면 누가 누구를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친구로서 충고할 수 있을 뿐이죠.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Don't Sleep, There Are Snakes)에 나오는 피다한족은 부모가 자녀를 진정으로 평등하게 대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잘 보여줍니다. 아마존 유역에 사는 원시 부족인 피다한족 어린이도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따라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면 부모가 자녀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 걸음마를 익히는 아이가 모닥불 곁에서 아장아장 걸어도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지 않고, 어린 아이가 칼을 가지고 장난해도 말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성인 남성과 진한 터치를 해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어리석은 행동을 자신이 선택한다면 자신이 고통을 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도로 자녀의 인격을 존중한다면 진정 "친구 같은 부모"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 부모는 아이를 끔찍하게 아끼고, 아이가 잘못되면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자녀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자녀가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고,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를 지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부모의 간섭은 자녀가 성인이 되어갈수록 줄어들어야 마땅하고, 자녀가 성인이 된다면 대등한 관계로 전환해야 하겠죠. 하지만, 그전까지는 어른의 판단력을 지닌 부모가 자녀의 인격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어린 자녀의 인생을 지도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참고 글- ‘친구같은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P.S. 제가 지지난주엔 독일에서 1주일간 출장을 다녀왔고, 지난주엔 한국에 오느라 글을 못올렸습니다. 블로그 운영에 매우 소홀했음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에서 또 다른 회의에 참석중이고, 7월 말이면 다시 독일로 출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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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