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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6 [연재] 이야기의 역사 3 (2)
  2. 2010/07/16 [연재] 이야기의 역사 2 (3)
  3. 2010/07/08 [연재] 이야기의 역사 1 (2)
이야기에서 출발한 인간의 역사는 이야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듭니다. 즉, 인격과 구체성, 단순한 인과관계를 배제하는 대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합당한 진리를 찾게 된 것이죠.

이야기에 의존하는 생각은 어린아이의 사고와 비슷합니다. "크리스마스에 받는 선물은 어디서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이들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상을 주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믿습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이러한 말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른이라면 "그렇다면 산타클로스가 24시간 안에 전 세계에 다니면서 수십억 명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야 할 텐데, 이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따라서 사실일 리 없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이는 언뜻 생각하기에 맞는 말처럼 보이는 말을 믿지만, 어른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보편적인 상황에 맞는 말을 믿는 것이죠. 결국, 사고력이 자라면 아이도 산타클로스라는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죠. 어쩌면 인류가 이야기를 벗어나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게 된 것도 인류의 사고력이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야기를 배제하고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수학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숫자는 세상이 논리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자,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논리와 수학의 결합은 수(numbers)를 만물의 근원으로 본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고, 근대에 들어선 "세상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다"고 말한 갈릴레이에서 보듯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신념이 되었으며,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책에서 물리현상이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뉴턴에서 완성이 됩니다. 이러한 숫자의 세계엔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오직 메마르고 건조한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죠.

이처럼 이야기 중심의 사회가 논리와 숫자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인간관계도 변하게 됩니다. 과거에 인간들을 묶어 주었던 이야기가 사라지면서 숫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인간을 숫자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라는 불평은 이러한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이죠. 이야기로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배웠던 우리 조상과 다르게, 우리는 숫자(연봉,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TV 인치 수, 그리고 트워터 팔로윙 수)에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에서 보듯, 인간은 숫자를 통해 세상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도 숫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합리론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인간도 세상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세상이 숫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인간도 숫자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을 분석하고 연구한다면, 결국 인간의 본질을 숫자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인간을 숫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위험한 주장으로 들립니다. 인간은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어떤 부분(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부분)은 숫자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와 숫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원인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성 파괴는 단순히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 자주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특히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가 뛰어난 과학기술을 대량살상 무기 만드는 데 썼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라는 이념에 따라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뛰어난 기술로 가스실을 건설한 독일인들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상실한 채 기술과 지식만 의존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주는 예죠. 또한, 선진국일수록 정신질환자가 많다는 사실은 현대 문명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은 목적을 "어떻게" 이루는지 잘 알지만,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왜" 그런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수학은 이처럼 인생의 목표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영혼의 영역이고, 영혼은 수학이 아닌 이야기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고 느끼는 사람 늘어날수록, 이야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거에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이야기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새롭게 부활하게 됩니다. 다음번엔 이야기의 부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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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야기는 지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야기의 인격성과 구체성 때문입니다. 역사의 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라는 인격의 구체적인 활동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통합해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있는 별을 묶어 만든 별자리를 생각해 봅시다. 인류는 별자리를 통해 무질서해 보이는 하늘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별들을 인격 단위로 무리지어 묶어놓고 나니, 하늘에는 수많은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난무하였고, 이러한 별들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질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통합하는 지식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했고, 결국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비인격적, 물질적 실체가 이 세상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 탈레스나 공기라고 본 아낙시메네스, 불이라고 본 헤라클리토스 등은 이러한 좋은 예죠. 이렇게 인격이 없는 물질에서 세상의 근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과학의 발달을 낳습니다. 과학은 연구의 대상이 비인격적이어야 하는데, 만약 연구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라면 변덕을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겠죠. 또한, 과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과학에서 하나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이 대상이 기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므로 새로운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로 작용할 때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인과관계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직관에 반하지만, 논리적인 결론을 더욱 중요시합니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 이유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오고, 따라서 직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지구가 해 주위를 돈다는 것이 과학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인 인격성, 구체성, 직관적인 인과관계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래서 대부분 민족은 전통적인 이야기에 얽매여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하루아침에 이야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철학계에서조차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탈레스만 해도 "만물은 신들로 가득하다."라고 말했고,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인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격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였기에 전형적인 이야기의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야기(예화)를 통해 설명함으로 이야기와 철학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과 이야기를 결합했을 뿐 아니라, 이야기를 철학에 종속시킨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고,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 셈이죠.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동원했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는 이성에 의해 창조된 도구라는 점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당시의 시인은 서정시인이 보다는 이야기꾼에 가깝습니다)을 추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그가 이야기와 철학이 충돌할 때는 철학이 이야기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에서 발견되는 철학과 이야기의 불안한 동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이야기의 완벽한 소멸로 끝이 납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야기는 분석의 대상(그의 저서 시학이 잘 보여주듯)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나누는 동반자는 아니었고, 결국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은 이야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된 합리성의 전통은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낳았고, 이 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양문명의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제거하고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니 사람들은 이야기가 그리워지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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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인간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해야 세상을 이해하고, 그럴 때에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세상에서 짧은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죠.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인간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점차 세상을 이해하였고, 이는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야기가 이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이야기의 세 가지 특징 때문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비인격적인 현상이나 존재에 인격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person)이기 때문에, 인격을 지닌 존재를 잘 이해하고, 그에 비해 인격이 없는 존재에 대해선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이진법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컴퓨터가 모든 데이터를 이진법으로 바꿔서 처리하듯,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은 모든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을 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격이 없는 지구가 해를 바라보면서 24시간에 한 바퀴 돈다는 설명보다는, 태양신이 불마차를 끌고 종일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을 한다는 설명이 인간에겐 훨씬 이해하기가 쉽죠. 견우성과 직녀성이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서로 가까운 듯 보인다는 설명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떨어져 지내다가 1년에 한 차례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준 다리 위에서 만난다는 설명은 훨씬 매력적입니다. 이러한 인격화의 과정을 통해 비는 하늘이 내리는 눈물로 바뀌고, 천둥은 죄인에 대한 하늘의 심판, 태풍은 바다의 분노로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죠.

또한, 이야기는 세상에 구체성을 부여합니다. 인간은 추상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훨씬 잘 이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듣기 원했고, 이야기는 이러한 필요를 잘 채워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닷물은 왜 짠가?"라는 질문에 대해, "강물에 녹아 있는 소량의 소금이 바다로 계속 모여들고, 물은 계속 증발하기 때문에 짜다"라는 설명은 구체성이 부족합니다. 그에 비해 "먼 과거에 바다를 알기 원했던 소금 인형이 바닷속에 뛰어들어 녹았고, 그래서 짜다"라는 설명은 "소금인형"이라는 구체적인 존재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에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구체성은 특히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때 중요합니다. 대부분 민족은 한 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특한 정체성을 얻을 때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구체성이 없기에 대부분 민족은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한국의 단군,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스위스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영구동맹, 미국의 Pilgrim Fathers)에서 기원을 찾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세상을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해줍니다. 철학에서 인과관계라는 개념은 매우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불을 관찰할 수 있고, 연기를 관찰할 수 있지만, 불 때문에 연기가 난다는 인과관계를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대부분 사람은 인과관계를 철석같이 믿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이 발생한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인과관계로 세상을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청개구리는 왜 비가 오면 울까?"라고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청개구리는 어머니 말씀을 반대로 하다가 오해가 생겨 어머니를 강가에 묻었는데, 비가 오면 어머니 무덤이 걱정돼서 운다."라는 설명이나 "인종마다 피부색이 다른 원인"이 궁금한 사람에게 "신이 도자기 굽듯 인간을 구웠는데, 굽는 시간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많은 사람에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복잡하고 논리적인 해답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A라는 존재가 B라는 행동을 했기에 C라는 결과가 생겼다."라는 해답은 훨씬 받아들이기가 쉽기 때문이죠.

이렇게 이야기는 인격, 구체성, 인과관계라는 틀을 제공함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세상을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이야기 중심의 문화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음 시간엔 이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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