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8/23 음식을 보는 또 다른 관점 (2)
  2. 2010/08/15 [연재] 이야기의 역사 5- 끝 (2)
  3. 2010/08/05 [연재] 이야기의 역사 4 (4)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면서 한국 음식 재료를 많이 가져온 덕분에 요즘은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유럽 음식 위주로 먹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여기서 인터넷에서 구한 재료들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이제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까지 있으니 당분간은 한국 음식만 먹고 살 수도 있겠군요.

어떤 사람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다가 먹는 편이 더 싸다고도 하지만, 저는 음식은 단지 시간이나 돈의 문제로만 따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중요한 요소를 단지 계산기 두드려서 나오는 이익관계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죠.

식사는 몸이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이지만, 인간에게 식사란 관계와 연관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느 문화에서나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는 식사를 함께하기 마련이고, 특히 자신이 직접 준비하는 식사는 상대방에 대한 최상급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꼭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해주길 원하고, 자식은 집을 떠나도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그리운 법이죠. 물론 과학의 관점으로만 보는 사람이라면 "누가 어떻게 해준 밥이라도 필요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기만 하다면 좋은 식사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을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영양소뿐 아니라 밥을 짓는 사람의 정성도 밥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겠죠.

음식을 영양학의 관점에서만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가 미국인의 미만 문제입니다. 미국인 중엔 살찔까 봐 고기, 기름, 탄수화물, 유제품을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살찌기 쉬운 음식을 거의 매일 먹는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보다 비만율이 높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외식을 좋아하고,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먹지 않는 가정이 많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습니다. 즉, 아무리 영양을 고려해 먹는다고 할지라도, 집에서 요리해서 먹지 않고 밖에서 사 먹기만 한다면 결국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죠.

사 먹는 음식은 직접 해 먹는 음식보다 맛이 좋긴 하겠지만, 이러한 음식이 몸에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실 음식은 달고, 짜고, 기름질수록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지만, 이러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에 부담되겠죠. 또한, 음식을 사서 먹는다면 내가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선택할 수가 없어서 내 몸에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실험해 보기 어렵고, 내 몸에 맞는 음식을 알아도 메뉴에 없다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늘 음식을 사서 먹는 사람은 집에서 음식을 해서 먹는 사람보다 건강을 지키기가 훨씬 어렵다는 뜻이죠.

근대로 들어오면서 인간은 모든 것을 비인격적인 숫자로 환원하였고, 이는 음식의 영역에도 적용되어 효과적으로 음식을 수송해서 저렴하게 열량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식료품의 가격은 내려갔지만, 동시에 한 지역에서 음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지역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비만, 성인병 등의 문제는 점차 심각해졌습니다. 최근 들어 전통적인 영양학과 다른 관점에서 음식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난 원인도 이러한 근대화의 흐름이 낳은 부작용 때문이죠. 패스트푸드에 반발하여 천천히 만든 음식을 즐기는 슬로우푸드 운동이나, 자기 지역에서 생산된 음식을 먹자는 운동도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일부분입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에는 자신이 직접 기르거나 채집한 재료만 써서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음식을 경제에서 떼어내어 개인의 영역으로 다시 집어넣으려는 노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대부분의 현대인, 특히 도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을 경제와 영양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관계,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보려는 자세일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조금이라도 요리와 식사를 인격적인 활동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된다면 현대에 들어 급증한 많은 질병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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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애플은 애플 II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로 오늘날 컴퓨터 사용환경의 기본인 GUI를 대중화한 회사입니다. 80년대 말 이후로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인텔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고전하던 애플은 90년대 말 일체형 컴퓨터 iMac을 내놓으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2000년대에 들어선 Unix를 기반으로 한 Mac OSX가 안착하고 인텔 CPU로 이주에 성공하면서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특히 컴퓨터 시장의 중심이 데스크톱에서 랩톱으로 옮겨오면서 뛰어난 디자인과 편리한 사용환경이라는 강점이 두드러지며 컴퓨터 판매량이 급증합니다. 게다가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등 개인용 제품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iTunes Store를 통해 미디어 유통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둠으로 이제는 컴퓨터라는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IT, 미디어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애플이라는 회사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애플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그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운 컴퓨터 회사로, 이들은 최초의 대중적인 개인용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를 내놓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중이 컴퓨터를 좀 더 쉽게 쓸 수 있도록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 원하던 스티브 잡스의 꿈은 매킨토시의 개발로 이어졌지만,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애플 이사회는 결국 그를 회사에서 몰아냅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은 정체성을 잃고 특징 없는 제품을 내놓다가 점차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결국, 회사의 문제를 깨달은 애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스티브 잡스가 세운 넥스트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스티브 잡스는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iMac을 내놓으며 애플이 부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2000년대 들어선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CEO일 뿐 아니라 대중을 열광케 하는 비저너리이고, 많은 사람은 그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키노트에서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발표는 모습을 보며 열광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나 두 번째 이야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두 번째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두번째 이야기엔 스티브 잡스라는 인간이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수만 명이 일하는 회사이고, 애플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숫자는 그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회사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애플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라는 식의 표현은 매우 모호하기 마련이죠(주주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이사회가 결정을 내렸다? 경영진이 결정을 내렸다? 담당 엔지니어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의 중심을 요구합니다. 애플의 경우엔 스티브 잡스가 그러한 역할을 하죠. 이러한 관점에서 애플의 특징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특징으로 환원됩니다. 매킨토시가 컴퓨터 폰트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잡스가 대학생 시절 calligraphy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고,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것은 잡스가 음악이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던 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식이죠. 이러한 해석은 긍정적인 면뿐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적용이 됩니다. 아이폰 4의 안테나 문제도 "스티브 잡스의 독선, 고집,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관계는, 이해를 위해선 대상에 인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인격체가 있다면 쉽게 이해하는데 비해, 간단해 보이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격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해서 없는 인격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기계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기계에 인격을 대입해서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를 들어, 기계가 잘 작동 안 하면 "어,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하겠죠).

인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수많은 세포가 결합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유기체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죠. 그런데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세포 중에 어떤 세포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활동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몸속에 침투한 병균과 싸우는 백혈구가 그러한 예인데,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마치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때 세포의 단위로 이해하지 않고 꼭 인격의 단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세포를 묶는 "인격"(person)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은 인격을 영혼(soul)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몸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백혈구가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통제하는 몸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각 백혈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영혼은 "내가 나 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포는 늘 파괴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치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영혼을 소유하기에 "나"일 수가 있죠. 이처럼 영혼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 아니라,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에 나오는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닌가?"라는 질문도, 영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영혼과 너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죠.

물론 근대 이후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늘었고, 결국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와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문제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죠. 나를 "내 몸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나를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가 다른 사람을 구성하는 10조 개의 세포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영혼을 제거하고 설명을 하려면 간단한 관계조차 설명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또한, 인간의 몸이 몇 년을 주기로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오늘의 나와 몇년 전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도 성립됩니다. 물론 인간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인 유전자"),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와 다르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은 유전자는 설명해도 유전자가 구성하는 "인간"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대니얼 데넷(Daniel Dennett)은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아(self)를 "이야기의 무게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가 쓴 이야기의 중심인 자아(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에서 그는 인격이 없지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만들어내듯,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두뇌에서 이야기(narrative)를 만들어내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고 주장합니다. 즉,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는 말이죠. 조금 황당한 주장이지만, "영혼"이라는 가정이 없이도 "자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지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내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내 영혼이 필요하다."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인간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혼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대니얼 데넷이 말한 바로는 인간이란 자신에게 "나는 물질을 넘어서는 존재다"라는 환상을 늘 심어주며 사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로봇과 마찬가지로 기계일 따름이지만, 영혼을 지닌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이론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A.I. 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바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로봇이 어떻게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처럼 단순한 두뇌에서 어떻게 자신을 속일 정도의 복잡한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이는 Douglas R. Hofstadter가 Gödel, Escher, Bach에서 제시한 모델(무의미한 기호가 의미를 낳는 과정)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자아의 실체도 부인하는 이 철학자가 이야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자아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의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으로 이야기를 쓰며 삽니다. 인간이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생으로 쓴 이야기가 내가 인생의 이야기를 쓰는데 영감을 불어넣게 때문이겠죠.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기 원하는 것도, 이야기를 접해야 자신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기 때문이죠. 부모가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교과서만 읽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라면 할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기가 쉽겠죠.

 지금 서점에 가면 "이야기를 활용해 프리젠테이션하는 법" "이야기를 통해 마케팅하는 법" 등의 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이 가르치는 내용은 대부분 "이야기를 이용해 남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위에 군림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인생의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의 남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인생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우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이성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로부터 인생의 진리를 배워왔습니다. 전통적인 기준과 가치가 무너져 인생의 방향을 찾기 어려워진 오늘날 사람들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야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야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이야기를 통해 남을 조종(manipulation)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이야기를 찾아, 그 이야기에 맞춰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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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중심이 이야기에서 이성으로 옮겨오면서 이야기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결국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학문과 예술 곳곳에서 생겨났는데, 이중 가장 흥미로운 예는 역사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불어의 histoire, 이탈리아어의 storia, 독어의 Geschichte 등). 이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설명한 이래로 역사와 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죠. 하긴 일반인이 생각하는 역사란 "어떤 사람이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고,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다."라는 기록이기에, 이야기의 세 가지 요소를 그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역사학계로 번지면서 "이야기 없는 역사"를 추구하는 역사학자들이 늘어났고, 이는 결국 아날학파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아날학파에서는 인물, 정치, 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거부하고, 양적인 자료에 의해 사회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구체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벌이는 사건들이 일으키는 결과," 즉 이야기를 배제한 역사학을 하겠다는 말이니, 이제 이야기와 역사가 분리된다는 말이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아널드 토인비가 역사학에 분업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역사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한탄했을 때 이미 예견할 수 있던 문제입니다.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음에도 이야기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또 다른 영역으로는 문학을 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듣기 원하는 욕구는 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어느 민족을 봐도 가장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학작품의 대부분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현대주의 문학을 추구한 제임스 조이스(특히 Finnegans Wake)나 사무엘 베케트(특히 Malone Dies) 등은 실제로 이야기가 사라진 작품을 씁니다. 물론 이야기가 사라진 문학은 대단히 기괴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문학에까지 미친 좋은 예이기에 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습니다.

역사학과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 이야기로부터 독립한 데 비해, 철학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야기로부터 독립합니다. 특히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의 세계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이들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험을 강조한 경험론자들은 조금 낫긴 하지만(베이컨은 New Atlantis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썼고, 버클리는 플라톤처럼 대화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습니다), 경험론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흄의 저작에서는 이야기가 거의 사라집니다. 칸트를 비롯한 독일의 관념론자들도 이야기를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를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철학은 이야기로부터 일찍 독립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역보다 이야기의 가치를 일찍 재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키르케고르는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의 한계를 깨닫고 좀 더 인간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을 찾고자 노력하는데, 그의 작품 중엔 이야기의 형태이거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 책이 많습니다(예를 들면 Stages on Life's Way나 Fear and Trembling). 니체도 이성 중심의 철학에 대해 반발하여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철학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철학과 다시 결합한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철학에서 이야기의 부활은 20세기에 들어 프랑스로 이어져 사르트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죠.

20세기에 들어 이야기가 부활한 가장 좋은 예로는 영화를 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야기가 파괴된 시기에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이야기를 공급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사의 초기부터 대중은 악당을 응징하는 영웅,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는 남녀 등 매우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열광하였고,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가장 잘 만든 미국의 영화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학계에서 벌어진 이야기 파괴 현상은 영화계를 피해 가지 않았고, "이야기(내러티브)를 탈피한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60년대 이래로 많이 있었지만, 결국 영화의 주류는 대중이 원하는 이야기 중심의 영화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화를 만들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하고, 이러한 자본을 얻기 위해선 대중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죠. 어쨌든 이로 말미암아 영화는 다른 현대 예술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사이에 대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TV 드라마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미국 드라마건 한국 드라마건 뚜렷한 줄거리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미국에서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시트콤 사인펠드인데, 사인펠드에는 가끔 이야기가 없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The Chinese Restaurant가 좋은 예인데, 중국음식점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이 에피소드에는 상황은 있지만, 줄거리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해체된 것이죠. 극 중 사인펠드와 조지 코스텐자가 방송국에 가서 시트콤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이야기가 없는 극을 만들고 싶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이 작품을 만든 사인펠드와 래리 데이비드(조지 코스텐자는 래리 데이비드의 분신이죠)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인펠드는 지극히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현대 예술계의 흐름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습니다(또 하나의 파격적인 사인펠드 에피소드인 The Betrayal은 시간의 역순으로 극이 진행됩니다. 같은 형식의 영화 Memento 보다 몇년이나 먼져 나왔다는 점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합리성에 밀려 사라지던 이야기는 합리성에 대한 실망과 대중예술의 발달이라는 두가지 원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으며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번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P.S. 연재를 시작해 놓고 글을 제 때 올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출장이 있었고, 시차 적응 등으로 정신이 없다 보니 글을 쓸 여유가 잘 없었네요. 다음주에는 꼭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변함없이 블로그에 찾아와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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