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9/28 집시와 유럽 연합의 미래 (4)
  2. 2010/09/15 잠재력 (3)
  3. 2010/09/03 외국어 학습의 세 가지 모델 (2)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들판에 캠핑카가 여러 대 서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자세히 보니 예상했던 대로 집시들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집시를 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같이 가던 독일 사람도 집시를 오랜만에 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에 신문을 보니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프랑스에 머물던 집시를 루마니아로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본 그 집시들도 프랑스에서 쫓겨나 루마니아로 돌아가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집시는 인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민족으로 유목민처럼 여러 지역을 떠돌며 생활하는데, 주변 민족과 문화와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중세엔 이방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받던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서 나치 정권에 의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멸종의 대상이 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이들이 많이 사는 동유럽지역이 공산화되면서 이들의 문화를 파괴하려는 공산 정부에 의해 핍박받았습니다. 이제 나치 정권도 공산 정부도 사라졌지만, "집시"를 혐오하는 대중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고, 경기침체 때문에 사나워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정치세력에 다시 한 번 핍박을 받게 된 것이죠.

집시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만큼이나 유럽에서 이방인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줍니다. 유럽엔 여러 민족이 있고, 그만큼 민족 간의 교류가 많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민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안정감에 바탕을 둔 관계입니다. 하지만, 집시는 돌아갈 본국이 없고(루마니아에 집시가 많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집시는 소수민족이기에 간다고 환영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는 20세기 초반 유대인의 상황과 같죠. 당시 독일엔 유대인이 많았는데,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에겐 본국이 없기 때문에(이스라엘은 1948년에야 탄생했죠)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미국, 영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에 유대인들을 받아달아고 요청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외국인(그것도 사람들이 안 좋게 여기는 민족)을 받아줄 나라는 없었죠. 이처럼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싫고, 유대인은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Die Judenfrage)죠. 결국, 이 문제에 대해 히틀러가 찾은 최후의 해결책 (Die Endlösung)은 유대인 학살이었고, 이것이 2차대전 중에 자행된 대학살의 실체입니다.

독일인의 유대인 대학살은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대부분의 유럽인은 이러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면 안 된다는데 동의합니다. 유럽인들이 자발적으로 국경을 허물고 국가 간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반성의 결과죠.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집시에 대한 탄압은 이러한 이상이 현실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쫓겨난 집시들은 루마니아 출신인데, 루마니아는 최근에 유럽연합에 가입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다른 유럽연합 국가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가 이들을 반강제로 쫓아냈다는 사실은 유럽연합 국가 간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해야 한다는 정신에 어긋나는 일로 지탄의 대상이 되죠. 또한, 상수도도 없이 생활하던 집시들의 정착촌을 허물었다는 사실은 인권을 중요시하는 유럽인들에겐 충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유럽인 중엔 인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기에 불법 정착촌을 건설한 집시의 죄 보다, 정착촌에 물을 공급하지 않은 정부의 죄가 크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는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문제의 전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최근에 유럽연합에 가입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대단히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 두 나라엔 집시가 많은데, 이동에 익숙한 집시는 잘 사는 서유럽으로 대량 이동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프랑스 정부가 집시 몇 명을 본보기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더라도, 결국 더 많은 숫자가 프랑스로 이주하기 마련이겠죠. 프랑스 정부가 집시의 귀국을 조건으로 지원금을 준 데 대해 "집시에게 휴가비를 줬다."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들이 곧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집시 문제는 결국 유럽인들이 추구하던 유럽 연합의 이상이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유럽인들은 유럽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유럽 지역의 모든 국가를 유럽연합에 포함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지는 나라들이 하나의 국경으로 묶이게 되었고, 이는 빈국에서 몰려오는 이민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유로존 국가간 경제차이 때문에 유로화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열린 국경까지 흔들리게 된다면 유럽연합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겠죠.

또한, 집시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건국 이념에 반하는 이번 조치로 말미암아 정말 오늘날의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물려받은 나라인지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들어 이민자의 증가로 말미암아 많은 프랑스인은 외국인 혐오증이 심해졌고, 이를 틈타고 불법 외국인의 추방을 내세우는 극우파 정당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법행위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죠. 지금까지는 표면적으로나마 이주민과 백인의 통합을 추진해 온 프랑스지만, 백인들의 위기감이 더 심해진다면 외국인을 차별하는 극우성향의 정책이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죠.

결국 수천년간 가난과 핍박 속에 살아온 집시들에게, 21세기의 유럽 연합도 안정된 거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부디 유럽 국가들이 관용의 정신을 잊지 않고, 집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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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자들이 주목한 주제 중의 하나는 "변화"였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변화가 없고, 어떻게 보면 변화가 많은데,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실체는 무엇이고 변화는 왜, 어떻게 생기는지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철학적 사고의 중심에 놓은 대표적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보았는데, 불은 고정된 형체가 없고 순간순간 모양이 변하죠. 그가 보기에 세상은 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세상이 늘 변화한다면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제 일어난 일을 반복하려고 보면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가 말한 "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다."라는 말은 이러한 신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건넌 강을 오늘 건너려고 한다면 어제 내가 건넌 강물은 이미 흘러가버렸기 때문에 다시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따른다면 "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을 뿐 아니라, 같은 강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한 곳을 흐르는 강이 같은 강이 아니라면, 이 강을 하나의 이름(예를 들어, 한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변화를 무한히 강조하다 보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변하지 않는 실체를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동시대를 산 엠페도클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세상에 변화란 없고, 만물은 고정된 상태로 영원히 지속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변화란 어떤 존재가 자신이 아닌 존재(what is not)로 바뀐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아닌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이 부분은 한국어로는 설명이 좀 힘든데, 영어로 생각해 보자면 what is not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뜻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죠. 엠페도클레스가 이 두 가지 의미를 혼동했다고 보면 이해가 되긴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따라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뀔 수는 없고, 그렇다면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물론 그의 철학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크게 봐서 그가 변화를 부인하였다는 점은 학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무쌍한 세상을 동시에 부인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는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을 통한 인식이 참된 지식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 눈에 세상 만물이 변화한다고 해도, 이는 감각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뿐이죠. 이처럼 극단적인 주장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개념으로 변화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의 철학에서 변하지 않는 실체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는 변화가 많은 그림자의 세계, 허상의 세계에 삽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많은 세계에서도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 이데아를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다양한 모양의 의자를 모두 의자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각 의자가 의자의 이데아를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이처럼 플라톤의 철학은 세상의 변화도, 변화하지 않는 실체도 동시에 설명해줍니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와 불변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잠재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잠재력은 사물 내부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물론 하나의 사물 속에 있는 "가능성"은 다양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잠재력이란 상황이 적절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없을 때 자연적으로 실현되는 가능성, 즉, 좋은 가능성입니다(오늘날도 "잠재력이 있다."라는 말은 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죠).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변화는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이고, 이러한 변화는 무질서한 과정이 아니라 존재의 내부에 있는 질서를 따른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물질세계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라고 본 철학자들과 다르게,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흔치 않지만, "잠재력"이라는 그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아실현"이라는 욕구를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단지 내가 잘난 사람으로 변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아실현은 내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는 뜻입니다. 즉, 내 잠재력을 실현하고 싶다는 뜻이죠.

잠재력의 실현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많은 인간, 특히 젊은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대부분 젊은이는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남을 놀라게 할 만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할 때, 그가 감독으로서 남을 깜짝 놀라게 할 재능을 이미 보였을 가능성은 극히 적습니다. 대부분의 감독 지망생은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꿈꿉니다. 예를 들어, 비디오 가게 점원 쿠엔틴 타란티노나 트럭 운전사 제임스 캐머런이 영화계에 투신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속에 있는 감독으로서의 잠재력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잠재력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에 따른 모험은 창조적인 직업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죠.

잠재력의 실현은 종교적으로 볼 수도 있고, 종교를 배제하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이 "열매를 맺으라"였다고 기록합니다(창세기 1장 28절). 열매는 나무에 숨은 잠재력의 표현이고, 그렇다면 이 명령은 "너의 잠재력을 발휘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긴 후, 나중에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는 이야기)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잠재력의 실현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신이 없는 세상에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초인"(Übermensch)이라는 개념에서 살아갈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했듯, 인간은 인간 이상의 존재로 진화할 잠재력이 있고, 이러한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의미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은 부인했을지라도, 잠재력 실현의 가치는 부인하지 않은 셈이죠.

니체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자 칼 융은 잠재력 실현의 단위를 인류에서 개인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 발달 과정을 개인화(individu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개인화란 집단에서 구분되지 않던 인간이 자신만의 특성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물론 이러한 개인화는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감추어진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봐야 하죠. 융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 인생은 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한 이야기다(My life is the story of the self-realization of the unconscious)"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잠재력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잠재력을 지녔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내 안에 어느 방향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없다면, 나는 그 방향으로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에 비해 내 안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면, 특히 그러한 잠재력이 크다면, 나는 이러한 잠재력을 발휘해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늘 실패감과 좌절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잠재력의 개념을 무시한다면, 인간은 삶의 방향을 잃고 맙니다. 만약 내 안에 나만의 고유한 잠재력이 없다면, 모든 사람은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야겠죠. 이는 융이 말한 개인화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는 개인의 잠재력을 무시한 획일화의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 잠재력이 있고, 이러한 잠재력을 잘 발휘해 돈을 번다면 좋지만, 그 사람의 잠재력이 돈의 영역과 전혀 상관없는데 돈을 많이 번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물론 돈에 관한 잠재력이 없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기도 불가능에 가깝겠죠).

잠재력을 중요시한다면, 인생은 모험이 됩니다. 잠재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눈에 보인다면 이는 이미 현실(actuality)이기 때문이죠. 잠재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늘 직관과 믿음에 속한 영역입니다. 따라서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길을 따라가는 모험이죠. 이러한 모험에 대한 동경은 흔히 여행의 욕구로 나타납니다. 여행은 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기에 모험이고, 이러한 모험은 숨어 있던 잠재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됩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 흥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러한 여행이 인생을 바꿀 잠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력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만약 내가 지금 잠재력이 없는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면 결국 이 일을 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진정으로 내가 잘할 소질이 있는 분야는 개발하지 못하겠죠. 반대로, 내가 진정으로 잠재력이 있는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하려면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안갯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느 쪽도 쉬운 결정은 아니고, 어느 쪽도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최소한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할 때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놓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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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학습은 매우 간단한 활동 같지만,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만약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이해에 맞춰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년 대부분이 영어 학습에 목숨을 걸어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의 현실을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이해가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발견하면 간단한 모델을 통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학습을 설명하는데도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해 볼 수 있겠죠.

많은 사람은 외국어 학습을 "지식 획득"의 모델로 이해합니다. 언어는 문법과 어휘로 구성되고, 따라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말은 문법과 어휘를 익히면 된다는 뜻이죠. 이러한 모델을 쓴다면 외국어 학습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초 수준의 문법을 익히고 중급 과정으로 넘어가면 되고, 가장 사용 빈도가 많은 단어 1,000개를 배우고, 그다음 단계의 어휘를 익히면 되는 식이죠. 이러한 모델로 생각할 때는 외국어 실력은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표준화한 시험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토익 등을 비롯한 외국어 능력 시험은 곧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는 잣대이죠.

이러한 지식 획득 모델은 외국어 학습 과정에 대한 신비감을 제거하고, 모두가 쉽게 따를 수 있는 학습 과정(문법과 어휘의 암기 학습 및 읽기 쓰기를 통한 연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외국어 학습을 민주화합니다. 즉 외국어 학습이 귀족 자제의 특권이 아닌, 국민이 모두 외국어를 배우는 시대엔 이러한 모델이 유용하다는 말이죠. 최근 취직이나 진학 시 외국어 성적을 평가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곳이 많은데, 이는 이러한 모델이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이 외국어 학습을 지식 획득으로 보는 모델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국어 학습이 단순한 지식 획득 과정이라면, 외국어 공부도 다른 공부처럼 노력에 따른 성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한민국 청년 중 영어공부에 목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또한, 영어 시험을 아무리 잘 봐도 실제로 외국인을 만나면 말 한마디 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외국어 실력이 표준화 시험으로는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는 이 모델을 거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외국어 학습을 보는 또 다른 모델은 "본질의 변화"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모델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인간이 자라면서 환경과 문화에서 받는 영향에서 생겨나고, 따라서 외국어를 잘하려면 그 나라의 문화에 노출되어서 학습자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즉, 과거에 나의 정체성이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본질을 얻어야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러한 모델에서 조기 외국어 교육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따라서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워야 외국어가 학습자의 본질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죠. 이러한 모델에서는 만약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성인이 되어서라도 외국에서 생활해야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외국 생활이라는 극단적인 체험을 통해 본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외국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죠. 요즘 유행하는 영어 조기 교육이나 외국 어학연수 등은 이러한 모델이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의 변화 모델은 지식 획득 모델 보다 외국어 학습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본질을 변화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외국어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사람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제대로 가르쳤거나, 자녀를 어학연수 보내 본 분이라면 이러한 활동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지식 획득 모델에서는 책을 사서 혼자 공부하든,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든,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지식만 획득한다면 누구나 외국어를 잘할 수 있다고 보는데, 본질의 변화 모델에 따르자면 외국어는 일부 부유층의 특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죠. 또한,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라면, 본질을 여러 번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두 개나 세 개의 외국어를 배우기는 거의 불가능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여러 개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이는 본질의 변화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외국어 학습이 본질의 변화를 동반하는 과정이라면, 외국어 학습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띄게 됩니다. 즉, 나의 본질이 "한국어만 하는 사람"에서 "한국어와 외국어를 하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이러한 변화가 한국인으로 나의 정체성 또한 바꾸어 놓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치적으로 국제관계가 민감한 시기엔 외국어 학습이 대단히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불어를 가르치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지 불어가 나쁜 언어이기 때문이 아니죠).

본질의 변화 모델은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의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에 근거합니다.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그 존재 속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내 눈에 보이는 이 의자가 의자인 까닭은 이 의자가 의자의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 만물은 본질을 지니고, 그렇기에 우리가 각 사물을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죠.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본질에 대한 철학적 회의가 들어오면서 "본질"이라는 개념에 대한 회의가 늘었습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물자체(Ding an sich)는 인간이 직접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인식론적으로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막아버린 셈입니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주장도 본질의 위상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과학에서는 원자를 구성하는 양자의 세계가 발견되고, 이 세계를 전통적인 과학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심리학에선 인간의 의식 밑에 존재하는 잠재의식이 발견되었고, 칼 융은 인간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집단적으로 연결된다는 이른바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이론을 내세우면서, 결국 인간 심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본질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철학에서도 연구의 초점을 본질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옮겨놓은 현상학(phenomenology)이 생겨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얼굴, 즉 페르소나(persona)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페르소나란 나의 본질은 아니지만, 내가 외부와 관계할 때는 "나"의 역할을 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은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영화 속에선 늘 가난한 외톨이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본질이 "부유하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면, 그의 페르소나는 "가난한 외톨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페르소나는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일종의 페르소나이죠. 이러한 페르소나는 우리의 본모습과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이 주는 자유를 누리고자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말도 하고, 실제로는 겪지 않은 일도 겪은 듯 글을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인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외국어 학습에 적용해 본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 본질을 바꿀 필요는 없고, 가면 하나만 만들면 된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의사가 되었다가 운동선수가 되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만, 배우가 의사 역할을 했다가 운동선수 역할을 했다가 목사가 되기는 어렵지 않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도 새로운 배역을 소화하기만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습니다.

배우들은 연기할 때 배역에 몰입한다(get into character)는 말을 씁니다. 이는 내가 진짜로 그 배역인 양 행동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내가 하나의 언어를 배울 때도 그 나라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그 나라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하면 분명히 외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어를 배우면 그 문화에 지나치게 동화되어 모국 사람을 만날 때 어색하게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모국에서 온 사람들과 관계할 때는 모국에서 쓰던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죠.

영화 아바타는 이러한 외국어 학습 모델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미군은 다른 행성에 사는 나비족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기 위해 인간과 나비족의 DNA를 섞어서 아바타를 만듭니다. 이 아바타는 인간이 기계에 들어가 조종하게 되어 있는데, 아바타를 조종하는 인간이 앞서 말한 "본질"이라면 아바타는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죠. 미군이 이러한 기술을 개발한 이유는 지구인의 모습 그대로는 나비족에게 접근할 수도,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외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전혀 다른 문화속에 들어가려면 지금 모습으로는 어렵고, 새로운 가면, 즉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엔 표정, 몸짓, 행동, 사고방식 등이 포함되죠. 물론 완벽한 변신은 불가능하겠지만, 배우가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맡았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배역에 몰입하면 됩니다.

이러한 모델의 가장 큰 약점은, 이 모델을 따르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하는데,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이미 외국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예를 들어 내가 일본인 사이에서 일본인처럼 행동하려면 일본인처럼 옷을 입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일본인처럼 말을 해야 하는데, 일본인처럼 말을 못한다면 일본인처럼 행동한다고 할 수가 없겠죠. 즉, 페르소나를 만들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하고, 언어 능력을 갖추려면 페르소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에 갇히고 만다는 점이 문제입니다(영화 아바타에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를 할 수 있는 나비족이 주인공의 언어 학습을 도와줍니다. 현실에선 나의 언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을 찾기가 쉽지 않겠죠).

이러한 세 가지 모델을 결합해 본다면, 외국어 학습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즉, 처음 외국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정보를 익히면 되고,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고 난 후라면 현지인의 페르소나를 갖추도록 노력하고, 이렇게 현지인처럼 행동하다 보면 결국 내부에 변화가 생겨 현지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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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