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2/27 멘토의 의미 (2)
  2. 2010/12/15 경제와 도덕 (2)
  3. 2010/12/01 햇볕정책은 실패하였는가? (7)

멘토의 의미

분류없음 2010/12/27 06:55
다음은 월간 <새가정>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는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입니다. 이타카의 왕이었던 그는 다른 그리스의 장수들과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후 아내와 자식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던 여행은 10년이나 걸리고, 그의 집안은 그의 아내를 차지하려고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풍지박산이 날 위기에 처합니다. 이처럼 곤경에 처한 오디세우스와 그의 가정을 불쌍히 여긴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Mentor)로 변신하고 나타나 오디세우스의 아들이 오디세우스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멘토"라는 명칭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처럼 멘토라는 이름은 역사가 깊지만, 막상 멘토라는 개념이 주목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멘토는 조언이 필요한 젊은이, 즉, 멘티(mentee)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면서 삶과 업무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인생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멘토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멘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관계와는 다릅니다. 멘토는 아버지처럼 도덕적 권위를 지니지만 가족은 아닙니다. 멘토는 때로 교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시된다는 점에서 학습지도가 중요한 임무인 교사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또한, 멘토는 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충고를 한다는 점에서 직장 상사와도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멘토는 조언을 통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재정과 영향력으로 도움을 주는 후견인과도 다릅니다. 멘토는 삶의 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할 모형(role model)과 비슷하지만, 일방적인 존경심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역할 모형과 다르게 멘토 관계를 맺으려면 상호 동의가 필요합니다. 멘토와 멘티는 자발적으로 연결된 친밀한 관계이기에 친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서로에게 조언하는 관계인 친구와 다르게 멘토 관계에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도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마지막으로, 멘토는 고민거리가 있을 때만 찾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꾸준히 만나는 관계라는 점에서 상담가와도 구별됩니다.

이렇게 엄밀히 멘토의 기준을 적용하자면 진정한 멘토의 개념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에 나오는 오비완 케노비는 젊은 제다이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멘토보다는 전통적인 스승의 모습에 가깝고,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매과이어 교수는 윌 헌팅에게 멘토처럼 조언을 하지만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조언자라고 볼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은 멘토 관계보다는 친구 관계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이 굳이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나오는 멘토의 이름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특정한 영역의 교육을 담당하지는 않았기에 스승은 아니고,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친구였고, 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니 직장 상사도 아니었으며, 평등한 관계가 아니니 친구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역사상 "멘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바로 오디세이에 나오는 "멘토"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들어 멘토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전파된 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교육은 늘 친밀한 인간관계에 기초하였습니다. 배우기 원하는 사람은 스승을 찾아가 자기를 소개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후 학문을 배웠고, 스승도 배우려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며 그를 가르칠지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교육이 인격적 관계에 기초하던 시절, 스승은 정보전달자이자 인생의 조언자였고, 따라서 스승 이외에 멘토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제도가 되면서, 가르쳐야 하는 임무를 띤 교사와 배워야 하는 임무를 띈 학생이 만나는 학교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는 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되었고, 교사가 인격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자는 아니지만 인격적으로 인생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멘토는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죠.

멘토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또 다른 원인은 오늘날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려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일단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사회의 일원이 되어 관습에 따라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가능성을 보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선배로서 인생의 지혜를 나눠줄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멘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은 멘토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적인 멘토 관계는 멘티에게 뿐 아니라 멘토에게도 유익한 법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에게 유익한 멘토관계의 예를 보여줍니다. 프로이트와 융이 만났을 때 프로이트는 원숙한 심리학자였고 칼 융은 그보다 스무 살이 어린 젊은 의사였지만, 둘은 나이를 뛰어넘어 심리학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가까운 관계로 발전합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토론을 벌였고, 서로의 꿈을 분석했으며,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융이 프로이트로부터 배웠을 뿐 아니라 프로이트도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래 융이 개발했지만 나중엔 프로이트도 자주 사용한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융이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끼친 좋은 예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성인이 된 후에도 좋은 멘토를 통해 조언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죠. 물론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이라면 언젠가 자신도 좋은 멘토가 되어 젊은이들을 지도해 줘야 마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대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유기적 연결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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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도덕

경제 2010/12/15 18:46
지난 며칠간 인터넷에선 롯데마트의 "통큰치킨"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통큰치킨은 롯데마트에서 판매하는 닭튀김인데, 일반 치킨 제품보다 양은 많으면서 가격은 절반 밖에 안 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롯데마트가 이러한 제품을 내놓으면 다른 치킨집의 영업에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실제로 최근 10여 년간 직장인들은 "잘리면 치킨집 차리겠다."는 말을 쉽게 할 정도로 치킨집은 경험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의 대표였는데, 대기업이 물량공세로 나오면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람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소비자들도 싼값에 치킨을 즐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도 언젠가 치킨집을 차려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을 생각할 때, 마냥 통큰치킨이 맛있게만 느껴질 수는 없겠죠.

결국, 롯데마트의 통큰치킨 판매중단으로 통큰치킨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정도 끝이 났지만, 이번 사태는 이마트 피자를 둘러싼 논쟁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마트 피자는 이마트에서 판매하는 피자로, 크기는 엄청나게 크지만, 가격은 저렴해서 많은 관심을 끈 제품입니다. 이마트피자가 화제를 일으키면서 이 제품 때문에 동네 피자집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비판을 접한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은 "님이 걱정하는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 "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라며 "싸게 공급하는 제품을 선택하면 되지, 이를 이념의 문제, 사회의 문제로 확대하면 안된다."라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러한 정용진 부회장의 발언은 지금 대형 마트들이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통해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 시장까지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두둔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대형 마트의 동네 상권 진출은 기존의 슈퍼마켓에 커다란 위협이지만, 엄밀히 말해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없기에 불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대형 마트는 "기업 경영의 자유"를 강조하며 지역 소매 시장에 진출하려고 하고, 기존의 슈퍼마켓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형 마트의 "탐욕"을 비난하며 이를 막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처럼 대형 마트의 영업행위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뒤에는 "경제활동이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면 모든 경제활동은 도덕의 잣대로 평가해야 마땅하고, 경제활동이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면 경제활동을 할 때는 도덕을 무시해도 괜찮기 때문이죠.

전통적인 사회에서 경제활동은 늘 도덕의 영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공정한 가격"(just price)이라는 개념을 통해 각 상품은 가치에 따른 공정한 가격을 지니고, 따라서 어떤 제품을 공정한 가격보다 높게 판다면 이는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동양에서도 팔 매(賣)자엔 선비 사(士)자를 넣는 등 경제활동을 할 때 도덕을 따라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습니다. 상도덕이라는 말의 존재도 이러한 관점의 표현이죠. 하지만,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제품의 가격이 급격하게 변동하면서 전통적인 경제관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선 밀 1파운드가 은화 하나라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경제가 복잡해진 오늘날 23인치 모니터의 가격이 얼마이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처럼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제관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였습니다. 그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우리는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착한 마음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경제활동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행동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보자면 비난받아야 마땅할 행동도 경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면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많은 문제를 낳았습니다. 우선, 경제를 도덕의 영역에서 분리하자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 비도덕적인 행위도 쉽게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즉,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에서(또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한에서) 모든 활동이 허용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영리한 사람만 이득을 보고 사회 전체로는 손해를 보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경제가 발달하던 70-80년대에 수많은 사람은 부동산 투기에 나섰고, 이런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보자면 집값이 지나치게 올라서 대부분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경제의 영역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돈 번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부동산 투기 전력이 있는 사람이 공직에 출마하면 "저런 사람이 어떻게 공직자가 될 수 있느냐"며 비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의 탈도덕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경제를 다시 도덕과 연관하려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도덕적 의미를 고려해 소비한다는 윤리적 소비주의(Ethical consumerism)가 좋은 예죠 (한겨레가 쓰는 "착한 경제"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따르면 물건을 살 때도 제일 싼 제품을 살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생산자가 생계를 유지하기에 적절한 가격을 지급한 원료로 만든 Fair trade제품을 사야 합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커피숍에서 Fair trade 커피나 초콜렛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불의한 경제구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경제에 지나치게 도덕적인 관점을 도입한다면 경제가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격의 결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이 인기가 많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고, 이 제품을 비싸게 판매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생산에 뛰어들면서 가격이 내려갑니다. 즉, 사회적 필요가 큰 제품에 자원이 모여들면서 결국 싼 값에 제품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시장의 기능을 도덕이 대체한다면,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오르면 이를 "상인들의 탐욕이 가격을 올린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고(실제로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요가 많다고 가격을 올리는 상인은 도둑질하는 셈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생산자들은 비난이 두려워서, 또는 정부의 가격 규제 때문에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생산에 참여할 의욕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는 많은데 생산은 적은 상태가 지속하고, 이는 제품의 품귀현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원유가가 올랐는데 가격을 통제해 주유소마다 휘발유가 동났던 오일쇼크 당시의 미국이 그러한 예죠. 더 흔한 경우는 도덕적 비난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가격 통제에도 가격이 오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면서 몇몇 생필품의 가격을 특별히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정부가 관리하는 품목의 가격은 일반 물가보다 더 많이 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관점과 시장의 기능은 상충하기 때문에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장을 도덕과 무관한 영역으로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히, 시장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시장의 활동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인간의 삶은 대부분 도덕과 무관하다는 말이 되고, 이는 인간의 본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입니다. 만약 시장이 도덕과 무관하다면 경제적 강자가 경제적 약자를 핍박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는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져, 강대국은 약소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사회는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정글이 되고 말겠죠. 이는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이 아니라,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의 역사적 현실입니다.

경제를 지나치게 도덕과 연관한다면 경제는 활력을 잃고 경제 발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반대로, 경제를 도덕에서 완전히 분리한다면 인간성의 파괴와 구조적 불의를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안에 따라 경제와 도덕을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해야 합니다. 통큰치킨 사태만 해도 단순한 상황 같지만 실제로는 "싼값에 제품을 공급하고 소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경제적 시각"과 "가난한 소시민이 대기업의 위협이 없이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도덕적 권리"가 부딪치면서 많은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쨌든 이번 사태는 경제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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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는 북한의 무력도발로 말미암아 긴장감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연례적인 남한의 군사훈련을 핑계로 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은 한국전쟁 이후로 최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고, 이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일단 북한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지만, 곧이어 남측에 호전적인 용어로 "침략을 좌시하지 않겠다."라고 위협하는 등, 긴장 상태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고 보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많은 사람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온건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한과 대립하기보다는 북한이 살 길을 마련해 줌으로 북한을 바꾸자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된 3대 세습이나 이번 연평도 공격에서 북한은 여전히 독재국가이며, 언제 다시 남한을 공격할지 모르는 반이성적인 국가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0년간 북한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바뀐 것이 없으니 햇볕정책에 대한 실망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죠.

하지만,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햇볕정책이 나쁜 정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집니다. 우선, 햇볕정책은 북한의 실체를 정확히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외투를 벗기 싫어하는 나그네를 햇볕의 온기로 벗게 했다는 우화에서 따왔습니다. 이는 햇볕정책이 북한을 "변해야 하지만, 변하기 싫어하는 존재"로 본다는 뜻이죠. 북한을 바꾸려는 이유는, 북한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피해가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만성적인 전쟁의 공포는 무의식적으로 남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 기업의 주가가 외국의 비슷한 규모의 회사보다 훨씬 낮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게다가 북한이 이대로 가다가 어느 순간 북한 정부 붕괴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남한 몫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북한을 바꿔서 남한과 대치관계를 끝내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서도록 하는 편이 북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훨씬 유리하죠.

이처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죠. 이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등을 통해서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핫라인을 개설함으로 혹시 모르는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노무현 정부 말기에 이르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아졌고, 이에 따라 주가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2000선을 가뿐히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후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하게 됩니다. 금강산에서 일어난 관광객 피격사건을 기점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고, 개성공단도 위축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한 수많은 조치와 협의문은 대부분 폐지되거나 무효가 되었습니다. 핫라인은 끊어져 위기의 순간 남북이 직접 접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리하게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무언가 위태하게 보이는 상황이고, 이번 연평도 도발도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햇볕정책으로 북한은 남한을 얕보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이 남한을 공격했다."라고 주장하지만, 햇볕정책과 상관없이 북한은 원래 호전적인 국가입니다. 이는 북한에 대해 강경책을 편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데서도 알 수 있죠. 햇볕정책은 이처럼 호전적인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바꾸는 정책이었고, 실제로 햇볕정책은 긴장관계를 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햇볕정책이 비난을 받는 또 다른 원인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은 연평도 도발이 있기 직전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였고, 이로써 북한의 핵 문제는 다시 한 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으므로 실패한 정책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한 책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뿐만 아니라, 김영삼,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정부가 같이 져야 합니다. 사실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는 모두 북한의 핵무기를 개발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머리를 싸매고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할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북한은 차근차근 핵개발을 진행했고,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햇볕정책은 "대화를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전문가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대화를 통한 해결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전쟁을 통한 해결이 있는데, 이는 클린턴 정부 때 미국에서 몇몇 인사가 주장한 방법이지만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쓴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북핵문제에 걸려 결국은 온건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전쟁이라는 카드를 제외한다면 북한 핵 문제는 대화로 풀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한반도 주변국이 모이는 6자회담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보수적인 언론인 The Economist도 연평도 도발 이후 낸 칼럼에서 "전쟁은 선택할 수가 없기에...결국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대화가 유일한 해답이기에 대화하라는 말이죠.

어쨌든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이제 남북한은 한동안 대치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남한에 대한 위협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고, 남한은 전쟁의 위협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시늉만 하고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가끔씩 대화의 자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는 다시 남한에 대한 무력시위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남북관계가 햇볕정책이 시작되기 전인 60-90년대의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뜻이죠. 과연 이러한 상황이 정말 햇볕정책을 쓰던 시절의 상황보다 좋은지는 각자 판단해 보면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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