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1/06 한국이 미국에게 중요한 이유 (14)
  2. 2007/11/14 미국은 정말 사악한가?
몇년 전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인사 팻 로버트슨이 TV에 나와 미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암살해야 한다고 주장해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차베스 때문에 베네수엘라가 "공산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륙 전체로 퍼지는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며, "[중남미는] 우리 세력권이고, 따라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할 수 없다" (This is in our sphere of influence, so we can't let this happen)고 강변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쓴 세력권 (sphere of influence)이라는 표현은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강대국이 존재할 때, 그 주변 국가는 그 강대국의 영향력을 받으며, 따라서 다른 강대국은 함부로 이런 국가들에 접근하면 안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19세기에 국력이 강해지면서 유럽 국가들에게 "북미와 남미에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바로 몬로 독트린이죠.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남미와 북미는 미국의 세력권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선언이 없다 할찌라도, 하나의 강대국이 있다면 그 주변 국가는 당연히 그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인정이 됩니다.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면서 러시아에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해 잠시만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 가까이 있으니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이고, 따라서 이런 국가에 군대를 보내기 위해선 지역 맹주인 러시아의 이해가 필요했던 것이죠.

물론 세력권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죠. 특히 두 개의 강대국 사이에 있는 나라는 한 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 다른 나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도 합니다. 폴란드가 그러한 예인데,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세력권에 속한 나라이고, 냉전시대엔 러시아의 위성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적어지면서, 폴란드는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러시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되려고 노력중입니다. 특히 폴란드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기지를 유치할 계획인데,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은 이에 대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유럽을 향해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지극히 위협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길게 뻗은 나라이고, 따라서 그 세력권에 포함되는 나라도 많듯, 미국도 태평양과 대서양에 접한 나라라 세력권이 넓습니다. 하지만 괌이나 사이판 정도가 서쪽의 끝인지라, 그보다 서쪽으로는 영향력을 주장하기가 힘들죠. 그런데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로, 일본은 미군이 주둔하는 미국의 세력권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섬나라라 미국을 위한 아시아의 교두부가 되기는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미국에겐 대륙의 동쪽 끝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를 놓고 고민을 합니다. 만약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면, 미국은 동아시아 전체를 중국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됩니다. 소련이 보기엔, 미국이 한반도를 차지하면 미국의 군대가 소련 바로 턱밑에 주둔하는 위험한 상황이 되죠. 미국은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자, 핵전쟁을 각오하고 소련과 마찰을 빚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세력권에 다른 강대국의 영향력이 들어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죠. 결국 고민을 하던 두 나라는 타협을 합니다. 즉, 미국에 아시아의 교두부를 마련해 주는 대신, 소련도 미국의 세력권 국가와 직접 맏닿지 않도록 위성국가를 세우는 것이지요. 외교적으로 보면 참 합리적인 결정입니다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멀쩡한 한 민족이 두동강이 난, 처참한 결과였죠.

지금도 한반도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아시아 대륙 동쪽에 미군이 주둔한 곳은 한국 밖에 없습니다. 즉, 한국은 미국의 영향력이 아시아에 미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곳이죠. 만약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된다면, 나중에라도 중국이 "다른 나라는 동아시아에 간섭하지 말라"는 새로운 독트린을 내놓을 때 이를 반박할 근거가 없습니다. 따라서 미군 철수는 결코 미국이 쉽게 추진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한 "동북아 균형자로"은 미국으로선 섬찟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의 세력권에 속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죠.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진지하게 이러한 계획을 추진했다기 보다는 미국에 겁을 주기 위한 발언이었겠지만, 어쨌든 미국으로선 거대해진 한국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세력권이라는 개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처럼 열강이 만나는 중심에 선 나라는 세력권의 판도를 바꾸는데 중요한 캐스팅 보드를 쥔 나라입니다. 물론 미국의 영향이 워낙 강력하기에 단기간에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미국과 관계할 때 단지 우리를 "미국이라는 고목에 붙은 매미"로 볼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파트너"로 자각하고, 따라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를 펼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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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얼마 전 러시아의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을 "사악한 미국"으로 표현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기사 링크). 아마도 그는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사악한 제국" (Evil empire)이라고 부른 것을 앙갚음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국가 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외교적인 수사를 동원해 싫은 말을 할 때조차 그럴 듯하게 하는 것이 예의인데, 80년대 냉정 상황에서, 특히 레이건처럼 반공주의를 신봉한 사람이 "소련은 그리 좋지 않은 몇 가지 특징을 자주 보일 가능성이 조금 있다고 할 수도 있는 나라" 라는 식으로 돌려 말할 리는 없었죠. 그리고 실제적 적국 관계인 미국과 소련이 그 정도 말로 관계가 더 악화할 것도 없었구요.

문제는 그 이후로 미국이 세계에서 인심을 잃으면서 이제는 누가 "사악한 미국" 하고 말할 때 많은 사람이 "그래, 미국은 정말 사악해" 하고 동의한다는 점이지요. 즉, 80년대 미국이 러시아에 대해 절대적으로 지니던 도덕적 우위를 지금은 많이 상실한 상태입니다. 사실 지금도 인권 유린이 쉽게 발생하는 러시아보다 미국이 아직은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만, 문제는 러시아에 대한 기대와 미국에 대한 기대가 다르고, 따라서 기대치를 근거로 평가할 때 미국이 러시아보다 별로 낫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이지요.

과거의 미국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고, 어느 순간 욕심을 절제할 수도 있는 나라였습니다. 2차대전에 유럽으로 많은 군사를 보내 그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유럽의 자유를 지키려고 노력한 나라니까요 (물론 이것도 미국이 완전히 이타적인 동기에서 행한 전쟁은 아니지만, 사실 어느 나라가 완전히 이타적인 동기에서 전쟁에 뛰어들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은 이제 이라크전처럼 이익이 날 것 같은 전쟁에는 참여하지만, 아프리카같이 이익이 나지 않을 지역의 분쟁은 피하려고만 합니다. 이라크전조차 이익이 날 듯할 때는 뛰어들었는데, 이익은 별로 안 나고 군사비용만 늘어나자 군대를 철수하라는 여론만 높아갑니다. 지금 미군이 철수하면 이라크는 내전에 휩쓸릴 것이 당연한데도 말이죠. 무책임하게 전쟁을 시작은 하되, 책임은 안 지겠단 태도입니다.

미국이 도덕적 우위를 잃은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대태러전을 수행하면서 관타나모 수용소로 대변할 수 있는 인권침해를 많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70년대 카터 행정부 때 미국은 독재 국가에 "인권을 존중하라"는 압력을 넣는 정책을 폈죠. (한국에도 "인권 상황 개선하지 않으면 주한미군 빼겠다" 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정책 추진으로 답했죠). 그런데 이제 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이 미국을 인권침해국으로 여깁니다. 그럴만한 것이 대태러전을 치르면서 아프간 병사들은 정규군이 아니므로 제네바 협약에 따른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달 찌, 테러범 한 명을 고문해서 많은 사람이 안전할 수 있다면, 테러범에 대한 고문은 용인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이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은 인권도 절대 가치가 아니라 그냥 실용적인 가치로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꼭 70-80년대 한국 군사지도자들 처럼요.

또한, 결정적으로 미국이 욕을 먹는 이유는 국제 관계를 너무 힘으로만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광우병 위험 지역이라 미국에서 수입하는 고기에 뼈를 다 발라내 달라고 한국 측이 요청했는데, 미국은 은근슬쩍 뼈를 섞은 고기를 보내더니, 한국 정부가 항의하니까, "사실 뼈 있어도 괜찮거든? 그러니까 뼈를 금지한 법률을 바꾸면 서로 편하잖아..." 하는 식으로 적반하장 언행을 펼치더군요. 이거는 완전히 자신들의 힘을 믿고 밀어붙여서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는 태도 아닙니까? 이것은 협력이라는 국제관계의 틀을 완전히 깨는 것이죠. 이라크전을 시작할 때도 UN에서 동의를 얻으려다가 프랑스 등이 거부권 행사를 하겠다고 하자, "그럼 UN 필요 없이 우리를 따르는 국가만 모아서 전쟁하겠다"라고 하며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즉, 국제관계의 관례나 정당성 따위는 필요 없고, 우리가 힘이 세니까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 태도이죠. 이러니 욕을 먹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미국이 겪는 어려움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냉전이 끝난 후 10여 년을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이라는 특수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던 시절엔 한쪽이 밉보이면 다른 한쪽으로 붙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아프리카 공화국이라도 눈치를 봐야 했던 미국이, 이제는 "우리가 싫으면 어딜 가겠나"는 심정으로 세계 모든 나라에 함부로 대하는 버릇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가 미국이라는 정점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문명 또는 문화라는 지역적 특색 중심으로 모이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은 통합했고, 중동은 이슬람의 기치 아래 뭉쳤고, 중국은 동아시아로 영향력을 넓히려 하고... 그리고 과거에는 미국이 힘으로 누르면 어떤 나라도 꿈쩍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힘으로 누르면 자살테러단을 보내 미국을 공격해 버리고, 그러면 미국은 단 몇 명의 테러리스트 때문에 나라 전체의 움직임이 멈춰 버리기도 합니다. 9/11 사태가 그런 예이지요. 따라서 이제 미국은 자신이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자신과 통하는 나라는 같은 문명인 영국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못 받아 들이는군요.

또 한 가지 어려움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립 200주년을 넘어서면서 뚜렷이 국가적 에너지의 고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즉, 과거의 미국은 활기차게 일하는 나라였는데, 지금의 미국은 정크 푸드를 너무 많이 먹어 살찐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나라로 바뀌었다는 점이지요. 활기찬 나라의 국민은 저축하고 검소하게 살지만, 쇠퇴기에 접어든 나라의 국민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소비합니다. 지금 미국의 경제가 그런 상황이죠. 미국은 무역적자가 워낙 많이 발생하는 중인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꽤 많이 발행했고, 그 중 상당한 물량을 중국과 일본이 사오고 있습니다. 만약 중국과 일본이 이러한 미국채를 한 번에 팔아버린다면 달러화는 폭락하고, 미국 경제 전체가 주저앉을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채를 사들이고 있긴 하지만, 이는 미국이 이제는 세계를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도움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가 이미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미국사회가 갑자기 회춘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미국의 쇠퇴는 꾸준히 이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 미국이 차지하던 자리를 유럽,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 등이 나눠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갔지만, 도덕적 우위뿐만 아니라 경제적 우위도 잃어가는 미국을 보면 자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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