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구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25 테이큰- 옛 미국의 사고로 만든 프랑스인의 영화 (6)
  2. 2008/08/17 다크 나이트- 선과 악의 경계에서 (1)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선과 악을 뚜렷이 구분하고, 선이 무력으로 악을 응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미국인의 세계관은 잔인한 인디언에 맞서 싸우는 서부 개척자들, 악랄한 나치를 무찌르는 미국군 등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 드러나죠. 하지만, 베트남전을 겪으면서 미국인들은 선과 악의 분명한 구분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이러한 고민은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낳았는데, "무고한 백인 개척자를 공격하는 인디언"이 사실은 "자신의 땅에 침범한 적을 내쫒기 위해 사투를 벌인 피해자"라는 새로운 역사적 인식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미국인들이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해 생각을 바꾸면서, 미국인들이 만드는 영화도 새로운 세계관을 반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즘 나오는 미국 영화에서는 과거 리셀 웨폰의 멜 깁슨이나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화끈하게 악당을 무찌르는 정의의 주인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21세기를 대표하는 슈퍼영웅 배트맨은 검은색 복장을 입고 밤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등 어두운 면을 특징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밝은 이미지만 강조하는 전통적인 슈퍼영웅(대표적인 예가 슈퍼맨)과 차별된 점을 보입니다. 아이언맨은 "악의 세력과 대항해 싸우는" 미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깨닫고 업종전환을 꿈꿉니다. 헐크는 주인공의 억눌려진 원초적 욕망의 표현이기에, 헐크의 행동은 늘 선과 악의 혼합일 수밖에 없습니다. 벤 애플릭의 감독 데뷔작 Gone Baby Gone은 아동납치라는 주제를 통해 "정의의 집행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한다면, 정의의 구현이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클로버필드와 우주 전쟁(The War of Worlds)은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루었는데, 주인공들이 적과 싸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를 보호하는데 그칩니다. 어차피 거대한 악은 내가 나서봤자 해결이 되지 않으니 내 주변사람이나 보호하자는 태도죠. 이러한 영화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과거의 영웅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할리우드 주류영화가 전통적인 미국인의 변화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비해, 프랑스 출신의 뤽 베송은 여전히 선악의 구분이 분명한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트랜스포터 시리즈는 주인공이 멋있는 자동차를 몰며 악당을 때려눕히는 뻔한 줄거리로 나름대로 많은 팬을 확보하였습니다. 그가 각본과 프로듀싱으로 참여한 테이큰(Taken)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바탕으로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리암 니슨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절대 선이고, 그의 딸을 납치한 범죄자들은 절대 악입니다. 리암 니슨은 단지 딸을 찾을 뿐 아니라 악을 응징하는데, 이는 만나는 모든 악당을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딸을 인질로 잡은 아랍인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총으로 죽인 것은, "말이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말을 하고, 협상을 하다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악당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지금 죽여버리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범죄자에 대한 잔혹 행위까지 정당하게 보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한 또 다른 예는 악당이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딸을 납치한 이들은 알바니아인이고, 부패한 경찰은 프랑스인, 그리고 납치된 처녀를 사들이는 사람은 아랍인입니다. 사실 나와 외모가 비슷하고,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사는 사람을 절대적인 악당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낯선 외모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은 악당으로 상상하기가 훨씬 쉽죠. 문제는 이렇게 외국인을 악당으로 묘사한다면,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성이 걷잡을 수 없이 표출되면서 매우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즘 미국 영화는 외국인조차 함부로 "절대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중동문제를 다룬 The Kingdom이 그러한 예인데, 이 영화는 모슬렘 테러리스트 세력을 소탕하는 줄거리를 담았으면서도, "결국 그들이나 우리나 복수를 원한다는 점에서 같지 않나?"라는 질문을 던짐으로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죠. 그에 비해 테이큰의 주인공은 "이 나쁜 외국 놈들을 깡그리 죽여버림으로 복수하겠다"는 식으로 단순 과격한 태도를 보임으로 관객 속에 잠자던 공격성을 일깨웁니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Chris Tookey에 따르면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10점 만점에 3.25점을 얻었는데, IMDB.com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7.9점입니다. 즉,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관객(특히 젊은 남성관객)에게는 확실한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죠. 이처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덕분에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2억 2천만 달러나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고 앞으로도 이러한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미국인들은 전통적인 세계관의 문제점을 직접 목격하며 자발적으로 전통적인 선악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관점을 버렸기에, 이러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과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장기적인 인기를 끌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테이큰이 생뚱맞게 20세기 미국인의 세계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프랑스인들(프로듀서 뤽 베송과 감독 피에르 모렐이)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은 역사적인 원인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길 꺼리지만, 프랑스인은 그러한 금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죠. 단순한 대결 구도를 바탕으로 한 폭력성을 코믹한 수준까지 밀어붙인 Hot Fuzz가 영국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즉, 20세기 중반까진 유럽 영화가 미국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이제는 미국 영화가 유럽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입니다.

미국 영화가 보이는 선악에 대한 고민의 모습은 단순한 미국문화가 좀 더 복잡해지는 중이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대외관계에서 많은 실패를 맛본 미국이 이제 좀 더 성숙하고 현실에 걸맞은 생각을 하는 국가로 변화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P.S. 내일 밀라노로 출발해 열흘 후에 돌아옵니다. 가서도 가능하다면 블로그에 글을 하나쯤 올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일정이 워낙 바빠 글이 자주 못나옴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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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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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얼핏 본다면 다크 나이트는 최신 장비로 무장한 주인공이 악당을 때려잡는 전통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 만든 영화 같지만, 그 속에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선과 악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담긴 매우 무거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에 평범한 헐리웃 영화 처럼 선 (배트맨과 하비 덴트 검사)과 악(조커와 범죄조직)이 싸우는 장면에서 시작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선 (배트맨)과 악(조커)이 선악의 두 얼굴을 한 하비 덴트를 놓고 벌이는 줄달이기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하비 덴트는 조커의 꾀임에 빠져 악을 행하다 죽고, 배트맨은 시민들이 절대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경우 생겨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누명을 뒤집어 쓰고 하비 덴트 검사의 명성을 지켜줍니다. 이는 선을 위해 악한 방법 (거짓말)을 쓰는 모습인데, 악당을 속일 때를 제외한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전통적인 영웅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죠.

그러면 배트맨은 왜 이처럼 하비 덴트의 명성을 지켜주려고 노력한 것일까요?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대중을 악에서 구하기 내려는 숭고한 이유 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악의 세계에 빠져들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정말 배트맨이 영웅이냐? 법망을 피해 활동하는 그가 정말 선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배트맨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도시 전체의 모습을 감시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그가 선의 이름으로 불법을 행하도록 용납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배트맨 자신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신이 절대선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조커는 단지 악일 뿐 아니라 배트맨 자신의 어두운 면을 표현한 존재이고, 이는 드래곤볼의 신과 피콜로의 관계 처럼, 선과 악이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입니다.

선이 악으로 변할 수 있다거나, 선과 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개념은 특히 대중 문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타워즈의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정의를 지키는 제다이 기사로 훈련되지만, 나중에 악의 화신인 다스베이더가 됩니다. 유명한 TV시리즈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헐크는 주인공의 억눌린 분노의 표현입니다.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은 각각 자신의 어두운 면과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슈퍼맨 3, 스파이더맨 3).

이처럼 선악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현대에 들어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해졌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유럽문명은 선이고, 야만은 악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많은 세계인은 히틀러의 독재정부가 악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이 벌이는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지지해야 할찌 북베트남을 지지해야 할찌 혼란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는 북베트남에서 군사시설을 방문했다가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금 많은 미국인은 테러와 벌이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테러리스트를 고문하겠다고 공언하는 미국 정부를 보며, 누가 더 큰 악인지 혼동을 느끼는 중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이 모호한 시대에,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얻는 정보를 통해 선과 악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이라도 거짓말을 통해 선한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다면, 인간의 판단은 무엇에 근거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이처럼 무겁고, 그 해답은 쉽게 찾기 힘듭니다.

어쨌든 헐리웃에서 블록버스터의 옷을 입고 이처럼 묵직한 주제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재능은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다음에 나올 놀란표 배트맨 3탄이 벌써 기대되는군요.

P.S.
Dark Knight이 누구인지 혼동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배트맨이 다크 나이트 맞습니다. 대사에서도 하비 덴트를 백기사라고 칭하고, 영화 마지막에 배트맨이 떠날 때 그를 "흑기사"라고 부르죠. 타임지에 실린 영화평에서도 배트맨이 다크 나이트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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