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lourious Basterds 마지막 장면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미국인 장교는 독일군 장교의 이마에 나치 상징을 칼로 새겨 놓고 "이것이 내 걸작일지도 모르겠군"("I think this just might be my masterpiece.")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며 Written and Directed by Quentin Tarantino"라는 자막이 나오죠. 곰곰이 의미를 따져 본다면 이 장면은 이 영화를 자신의 걸작으로 생각하는 타란티노 감독의 자부심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간 세계 평론가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최신작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를 그가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뽑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와 살아 있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타란티노 특유의 재치는 여전하고, 각 챕터를 다른 영화 형식으로 만드는 등(예를 들어, 1장은 서부극, 2장은 잔혹극, 3장은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표현은 지극하지만, 2차대전을 무대로 한 전쟁 영화치곤 액션이 부족했고, 필요 없이 잔혹한 장면이 너무 많으며, 독일의 모든 지도자가 모인 영화 시사회장에 등장하는 경비병이 단 두 명인 데서 알 수 있듯 줄거리의 현실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일까요?
타란티노 감독의 의중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의 주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전쟁이 아닙니다. 전쟁을 주제로 본다면 이 영화는 과장된 묘사로 가득한 이류 영화일 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남녀 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이는 프랑스 여인과 독일인 병사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대신, 서로에게 총을 쏘며 끝나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미지와 현실, 그리고 영화의 3각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영화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적진에 침투한 병사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거짓 신분을 취득합니다. 연합군에 협력하는 여배우나 나치에게 쫓기는 프랑스 유대인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신분을 숨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 태도를 흉내 내고, 때로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는 옷을 입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신은 현실의 왜곡이기에 부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만약 나치가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과거를 숨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을 맞추겠죠. 그가 이웃에게 친절하고 늘 웃는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한다면 "이 사람이 과거에 나치였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겠죠. 이처럼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함으로 거짓을 낳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가 이미지를 보여줌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입니다. Inglourious Basterds 에 나오는 영화 속의 영화 "국가의 자랑"(Stolz der Nation)을 보면, 홀로 적들과 싸우는 병사가 바닥에 나치 상징을 새겨 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위태한 전투를 벌이면서 바닥에 문양을 새길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만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꼭 필요하고, 관객들을 이를 보며 환호합니다. 영화를 통해 한 명의 평범한 병사는 전쟁영웅으로 거듭나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를 구하기 위한 영웅적 행동으로 격상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로 수백 명과 맞서 싸운 독일 병사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영사실에서 나옵니다. 영화 속에선 영웅으로 그려졌지만, 현실 속의 자신은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함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쓰이기에 현실의 노예, 현실을 지배하는 세력의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이러한 노예생활에 싫증을 내고, 현실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타란티노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그는 현실에 종속된 영화를 해방해, 현실을 지배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그의 욕망은 영화 필름에 불을 붙임으로 독일 제3제국을 무너뜨리는 영화관 장면에서 잘 표현됩니다. 이 기이한 시퀜스에서 나치의 핍박을 피해 숨어 살던 쇼샤나 드레퓌스는 독일인들이 즐기던 애국 영화를 끊고 화면에 등장해 복수를 선언하고, 핍박받는 또 다른 인종인 흑인의 도움으로 필름 더미에 불을 붙임으로 영화관에 있던 나치 지도부의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현실에 종속되던 영화(=필름)이 현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격상하는 순간입니다. 현실에 대한 영화의 저항 선언으로 이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영화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 영화가 역사를 바꿔 썼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1945년 베를린에서 죽는 히틀러는 이 영화 속에서 그보다 훨씬 전 파리에서 죽습니다. 대부분 관객은 이를 보며 "에이, 말도 안된다."라고 했겠죠. 하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현실에서 독립했다면 현실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영화의 필요를 따라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죠.
여기까지만 본다면 타란티노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치 장교 한스 란다는 연합군과 거래를 통해 독일 제3제국의 붕괴를 돕는 대신 유대인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고 세계를 구한 전쟁 영웅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왜곡을 위해서 그는 독일 군복을 벗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의 평상복을 입을 생각이죠. 하지만, 영화에서 한스 란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 분)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현실 왜곡을 참지 못하고 란다의 이마에 나치 문양을 칼로 세깁니다. 이제 란다는 나치일 뿐 아니라, 나치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죠. 이처럼 현실과 이미지를 통일하는 작업의 주체는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브래드 피트입니다. 사생활을 보나 영화 속의 이미지를 보나 가장 영화배우 다운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는 곧 영화라는 매체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죠. 즉, 이 장면에서 영화는 현실과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앞 장면에서 등장한 "현실을 지배하는 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영화"라는 개념의 표현이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두 개의 다른 영화관을 이 영화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개념은 영화사를 지배한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한 영화에서 두 전통을 하나로 묶는 대담한 시도를 한 셈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분명히 이와 유사한 해석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는 타란티노를 진정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 말 그대로 걸작으로 인정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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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15년간 세계 평론가와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최신작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urious Basterds)를 그가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뽑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인물 묘사와 살아 있는 대사에서 느껴지는 타란티노 특유의 재치는 여전하고, 각 챕터를 다른 영화 형식으로 만드는 등(예를 들어, 1장은 서부극, 2장은 잔혹극, 3장은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표현은 지극하지만, 2차대전을 무대로 한 전쟁 영화치곤 액션이 부족했고, 필요 없이 잔혹한 장면이 너무 많으며, 독일의 모든 지도자가 모인 영화 시사회장에 등장하는 경비병이 단 두 명인 데서 알 수 있듯 줄거리의 현실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일까요?
타란티노 감독의 의중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의 주제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전쟁이 아닙니다. 전쟁을 주제로 본다면 이 영화는 과장된 묘사로 가득한 이류 영화일 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남녀 간의 사랑도 아닙니다. 이는 프랑스 여인과 독일인 병사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대신, 서로에게 총을 쏘며 끝나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쟁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미지와 현실, 그리고 영화의 3각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영화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적진에 침투한 병사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거짓 신분을 취득합니다. 연합군에 협력하는 여배우나 나치에게 쫓기는 프랑스 유대인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신분을 숨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 태도를 흉내 내고, 때로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는 옷을 입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신은 현실의 왜곡이기에 부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만약 나치가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과거를 숨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만 초점을 맞추겠죠. 그가 이웃에게 친절하고 늘 웃는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한다면 "이 사람이 과거에 나치였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겠죠. 이처럼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함으로 거짓을 낳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가 이미지를 보여줌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입니다. Inglourious Basterds 에 나오는 영화 속의 영화 "국가의 자랑"(Stolz der Nation)을 보면, 홀로 적들과 싸우는 병사가 바닥에 나치 상징을 새겨 놓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위태한 전투를 벌이면서 바닥에 문양을 새길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만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꼭 필요하고, 관객들을 이를 보며 환호합니다. 영화를 통해 한 명의 평범한 병사는 전쟁영웅으로 거듭나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를 구하기 위한 영웅적 행동으로 격상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로 수백 명과 맞서 싸운 독일 병사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영사실에서 나옵니다. 영화 속에선 영웅으로 그려졌지만, 현실 속의 자신은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함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쓰이기에 현실의 노예, 현실을 지배하는 세력의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이러한 노예생활에 싫증을 내고, 현실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타란티노가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그는 현실에 종속된 영화를 해방해, 현실을 지배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그의 욕망은 영화 필름에 불을 붙임으로 독일 제3제국을 무너뜨리는 영화관 장면에서 잘 표현됩니다. 이 기이한 시퀜스에서 나치의 핍박을 피해 숨어 살던 쇼샤나 드레퓌스는 독일인들이 즐기던 애국 영화를 끊고 화면에 등장해 복수를 선언하고, 핍박받는 또 다른 인종인 흑인의 도움으로 필름 더미에 불을 붙임으로 영화관에 있던 나치 지도부의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현실에 종속되던 영화(=필름)이 현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격상하는 순간입니다. 현실에 대한 영화의 저항 선언으로 이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영화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 영화가 역사를 바꿔 썼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1945년 베를린에서 죽는 히틀러는 이 영화 속에서 그보다 훨씬 전 파리에서 죽습니다. 대부분 관객은 이를 보며 "에이, 말도 안된다."라고 했겠죠. 하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현실에서 독립했다면 현실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영화의 필요를 따라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죠.
여기까지만 본다면 타란티노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치 장교 한스 란다는 연합군과 거래를 통해 독일 제3제국의 붕괴를 돕는 대신 유대인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고 세계를 구한 전쟁 영웅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왜곡을 위해서 그는 독일 군복을 벗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의 평상복을 입을 생각이죠. 하지만, 영화에서 한스 란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 분)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현실 왜곡을 참지 못하고 란다의 이마에 나치 문양을 칼로 세깁니다. 이제 란다는 나치일 뿐 아니라, 나치의 이미지를 지니게 되죠. 이처럼 현실과 이미지를 통일하는 작업의 주체는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브래드 피트입니다. 사생활을 보나 영화 속의 이미지를 보나 가장 영화배우 다운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는 곧 영화라는 매체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죠. 즉, 이 장면에서 영화는 현실과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앞 장면에서 등장한 "현실을 지배하는 영화"와는 다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영화"라는 개념의 표현이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두 개의 다른 영화관을 이 영화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이 두 개념은 영화사를 지배한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타란티노 감독은 한 영화에서 두 전통을 하나로 묶는 대담한 시도를 한 셈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분명히 이와 유사한 해석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는 타란티노를 진정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 말 그대로 걸작으로 인정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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