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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5 [연재] 사회와 공동체 3 (4)
  2. 2010/02/23 [연재] 사회와 공동체 2
  3. 2007/12/11 한국 여자들은 왜 아나운서가 되고 싶을까? (3)
혈연이나 관계에 기초한 집단(Gemeinschaft)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이익을 넘어서는 집단이고, 건강한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가족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Gemeinschaft)의 개념이 사회(Geselschaft)의 개념으로 대치되는 흐름 속에서 가정의 의미도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죠.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들은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겨루고, 딸은 아버지를 놓고 어머니와 겨루는 관계 속에 삽니다. 이는 개인은 가족 속에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는 뜻이죠. 이러한 관점은 가족을 이상적인 사랑과 질서의 공동체로 보는 유교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가족을 모델로 사회를 재구성하기 원했던 유학자들은 사회의 모범이 될 가족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고, 그에 비해 구성원의 이익 추구를 집단의 존재 이유로 보는 시각이 강한 서구 문화에서 자라난 프로이트는 가족조차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죠.

가족을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결혼에 대한 일반의 의식도 바뀌게 됩니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유교의 관점에서 답하자면 "가족을 위해서"입니다. 부모가 나의 결혼을 원하고, 결혼을 함으로 가족 구성원의 숫자를 늘려 가문의 세력을 키워야(농경 사회에서 노동력의 향상은 곧 부의 증가를 뜻했습니다) 하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결혼을 해서 행복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젊은이들은 부모가 짝을 지어준 사람과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만약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행복이 줄어든다면 결혼할 이유가 없죠. 그러니 요즘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행복한 결혼을 하자면 준비해야 하는 것도 많고(학력, 직장, 돈 등), 따라서 결혼 연령이 점차 높아집니다.

결혼이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결혼을 했다가 행복하지 않다면 결혼을 취소해야겠죠. 따라서 서양이나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는 이혼율이 높습니다. 또한,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한다면 감정적, 재정적으로 손해가 크기 때문에 아예 결혼이라는 부담감을 제거하고 관계를 즐기기만 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유럽에는 결혼한 커플 만큼이나 동거만 하는 커플이 많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동거(concubinage)가 정상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았기에 사회적으로 완전히 용납이 됩니다(예를 들자면,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사르코지와 대결을 펼쳤던 세골렌 루와이알이 또 다른 정치인인 프랑수아 올랑드와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혼과 동거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동거를 하거나 이혼을 한다면 가정의 재생산이 안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동거나 이혼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으로 보이겠죠.

자녀출산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가족관에서는 자녀출산은 부모의 의무였지만, 이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녀를 낳았을 때 얻는 유익이 낳지 않았을 때 얻는 유익보다 커야 자녀를 낳겠죠.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녀를 낳았을 때 얻는 유익이 자녀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수고보다 더 값지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출산율이 점차 낮아지는 것이죠. 출산을 나의 이익이 아닌, 자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즉, 자녀를 낳았을 때 과연 자녀가 행복할 만한 환경을 내가 제공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묻는 것이죠. 물론 이 힘든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그렇게 보자면 자녀를 낳지 않을 이유만 하나 늘어날 뿐입니다. 그에 비해 옛날 사람들은 출산할 때 자녀의 행복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습니다(물론 피임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사회에서 자녀 출산은 부부의 의무였고, 자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든 아니든 부모에게 효도할 의무가 있었을 뿐이죠.

이처럼 가족이 이익 집단으로 바뀌면서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많이 변했습니다. 문제는 이익의 관점에서 가족을 보면 결혼을 할 필요도 없고, 자녀를 낳을 필요도 없는데, 그렇다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가정생활을 거부한다고 꼭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해질 가능성이 크죠. 영화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에 나오는 "가정을 꾸리면 불행할 것 같아 결혼하지 않았는데, 아이와 함께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니 부러워서 눈물이 나더라"는 멕 라이언의 대사는 현대인의 고민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느라 자녀를 낳지 않으니 국가 전체의 출산율이 낮아져서 결국 국가적 위기 상황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익만 추구하는 태도가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지금 미약하게나마 "공동체 회복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을 이익 집단에 속한 존재로 보는 관점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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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로마로부터 이익 집단의 개념을 물려받은 유럽은 이익에 따라 작동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근대 국가가 그것이죠. 근대 국가는 부족이나 민족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부족이나 민족은 혈연 공동체이고, 집단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가 전제됩니다(흑인들은 이러한 공동체 개념에 익숙하기에 처음 만나도 서로 "brother, sister"라고 부르죠. 백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국가는 혈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구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인위적인 조직이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국가를 예술 작품에 비유한 것(Der Staat als Kunstwerk)은 이러한 국가의 인위적 성격 때문입니다.

국가는 인위적 조직이기에, 국가는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이 부족한 독일은 터키인을 많이 받아들였고, 결국 독일에 사는 터키인은 독일인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관점에서 보자면 터키인이 독일인이 될 수는 없지만, 국가의 관점에서는 가능하죠. 또한, 국가의 개념을 쓰자면 같은 민족도 손해를 끼치면 관계를 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한국인들이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에 따르는 비용을 이유로 통일을 꺼리게 된 것이 좋은 예죠.

이처럼 국가의 개념이 공동체에서 이익 집단으로 발전하는 현상은 유럽 역사의 독특한 산물이고, 다른 지역에선 국가를 이익 집단이 아닌 공동체의 연장으로 보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중국이 좋은 예죠. 중국의 정치사를 지배한 유교 이념은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봅니다. 유교에 따르면 가족에서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듯 사회에서도 남에게 예의를 갖추고, 친척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 행동하듯,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이처럼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보면 가족이 구성원에게 하는 요구를 국가도 개인에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의 요구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효도이죠. 효도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부모님께 잘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를 국가에 적용하면 충성이 됩니다. 충성은 국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려는 태도이죠.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묶은 충효사상은 가족의 개념을 국가로 확대하는 열쇠였고, 유교문화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충효사상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모델에 기초한 국가의 개념은 국제관계에도 적용됩니다.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로 보자면 두 나라 사이에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가 성립합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군신 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성립이 되겠죠(군신 관계의 핵심인 충은 곧 효와 병행하는 개념이기에 군신 관계도 일종의 가족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군사부일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의 모델로 이해하면 가족 관계의 덕목이 국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어버이처럼 섬겨야 하고,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효심 깊은 아들이 칭찬받듯, 큰 나라를 섬기려는 태도(이른바 사대주의)는 유교에서 마땅히 칭찬받아야죠.

하지만, 국가 관계를 가족 관계가 아닌 이익 관계로 본다면 나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좋은 나라, 해로움을 끼치는 나라는 나쁜 나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나라를 가까이하고, 해로운 나라를 멀리하면 될 뿐이죠. 이러한 관점은 유교에선 지극히 불손한 태도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용 노선을 추구하던 광해군의 정책은 유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들이 보기에 중국을 지배하는 명나라는 우리에게 형과 같은 나라이고, 명나라를 돕지 않으려는 태도는 가족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은 미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한국은 미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미국은 은인의 나라이고, 미국을 대할 때 손익의 관계에서 보는 태도는 매우 불손하기 때문이죠. 이들이 보기에 한국은 "미국이 감동할 정도로 미국을 도와야" 마땅합니다(물론 이와는 다르게 한국이 미국을 돕는 것이 한국에게 이익이기에 미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앞의 주장과 결론을 같지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다르기에 다른 입장으로 봐야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국이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충격 그 자체였죠.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란 젊은 세대 중에는 국제 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들은 명분에 얽매어 실리를 잃는 외교는 어리석어 보일 뿐이죠. 이처럼 국가라는 집단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국제관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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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럽의 언론들은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미모의 앵커우먼 로랑스 페라리와 교제중이라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사르코지가 최근에 이혼하였고, 페라리도 얼마전 이혼한 상태라 사귄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로랑스 페라리는 클레어 샤잘 등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여성 아나운서인데, 이번 일로 더욱 유명해지겠군요.

생각해보면 프랑스는 한국 처럼 여자 아나운서가 사회의 관심을 끄는 점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그에 비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여자 아나운서는 그저 방송계의 일부분일 뿐, 사회적인 인기를 끄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이나 프랑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인기를 끄는 원인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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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강했고, 지금도 유교의 가치관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교의 가치관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고, 자신을 드러내면 안됩니다. 유교적 사고에 따르면 섹시한 여자는 곧 천한 여자죠. 심지어 연예인 중에서도 섹시한 이미지를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섹시한 이미지의 여가수는 80년대 김완선 이후에 2000년대 이효리까지 한동안 공백기였고, 섹시한 이미지의 여배우도 많지 않죠. 사회의 인식이 그러하니 한국의 여성은 섹시한 이미지를 추구하기를 대단히 어려워 합니다.

섹시한 이미지를 추구할 수 없기에 한국 여성들은 단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단아한 아름다움은 천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이러한 이미지에 가장 잘 맞는 직업은 바로 아나운서입니다. 그러니 여성들은 아나운서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완성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지요.

유교의 또 다른 영향은 교육에 대한 존중입니다. 따라서 유교의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는 교육열이 높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아나운서는 지적인 이미지와 별 상관 없는 다른 연예인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권위 있게 말을 하고, 따라서 지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여성들은 아나운서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죠. 그에 비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연예인에게 지성까지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지적인 이미지의 여자 아나운서를 크게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데, 프랑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인기가 많은 이유도, 지성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분위기 (요즘은 변하는 중이긴 하지만)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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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한국 여성은 여자 아나운서처럼 똑똑하면서도 단아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원하기 때문에 여자 아나운서를 선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가수나 여배우를 롤 모델로 삼는다면, 한국에서는 아나운서가 젊은 여성들의 롤 모델이죠 (특히 90년대에 백지연씨가 이런 역할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나운서를 동경하는 마음 뒤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지요. 그러고 보면 전통적 가치관은 세상이 바뀌어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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