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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 Doctor

문화 2009/08/21 06:52
요즘 저는 휴가를 맞아 비디오를 보며 느긋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디즈니의 고전 만화영화 피노키오를 봤습니다. 옛날에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런지 크게 재미는 없었지만, 손으로 정성스럽게 그려낸 흔적에서 정성이 느껴져 좋았습니다.

아마 피노키오를 본 적이 없는 분이라도 "When you wish upon a star"로 시작하는 주제가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주제가는 지금도 디즈니사의 상징으로 자주 쓰이기 때문이죠. 이 주제가는 극 중 지미니 크리켓이라는 귀뚜라미가 부릅니다. 지미니 크리켓은 피노키오의 친구로, 그를 유혹에서 건져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작품 해설을 들으니 지미니 크리켓은 디즈니가 피노키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늦게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탈리아의 카를로 콜로디가 쓴 피노키오의 모험(Le avventure di Pinocchio)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피노키오를 만화영화로 만들려고 하니 원작에 나온 말썽꾸러기 피노키오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스토리 전개가 어려웠죠. 그래서 디즈니는 중간에 작품 개발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스토리를 만들도록 지시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작에서는 매우 작은 역할만 하는 귀뚜라미를 인물로 격상하게 됩니다. 귀뚜라미에게 웃음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기면 피노키오는 순진한 어린이 역할만 할 수 있기에 관객이 피노키오를 받아들이기가 쉬웠고, 귀뚜라미가 피노키오에게 유혹에 빠지지 말도록 설득하는 장면을 넣어 영화를 보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귀뚜라미가 주제가를 부르게 함으로 극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도 맡길 수 있었죠(피노키오는 이 주제가를 부르기에 너무 어렸고, 제페토 할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았죠). 결국, 지미니 크리켓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것이 피노키오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영화가 되는데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고 할 수 있죠.

보통 초기 단계의 대본은 영화로 만들기엔 무언가 아쉬운 상태입니다. 매력적인 등장인물, 흥미로운 줄거리에도 어딘가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이런 대본을 손봐주는 사람이 바로 script doctor입니다. Script doctor는 말 그대로 문제가 있는 대본의 병을 고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리지널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레아 공주로 나왔던 캐리 피셔는 script doctor로도 유명한데, 대본을 쓰다가 난관에 부딪치면 그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작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보통 당사자는 너무 대본을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고, 따라서 제삼자의 조언이 유용하죠.

Script doctor가 대본의 병을 고친다면, 편집자는 영화의 병을 고칩니다. 어떤 영화는 촬영이 끝났지만 무언가 어색하고 스토리가 말이 안되는데, 이럴 때 문제를 제거하고 영화를 살려 낼 책임은 편집자에게 있죠. 꼭 병이 든 영화가 아니더라도, 편집자는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네마 천국 감독판을 보면 감독은 주인공인 토토(살바토레 디비타)가 엘레나와 왜 헤어졌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international version을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이를 상영시간 단축을 위한 결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편집자가 이 영화의 메시지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영화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남녀 간의 사랑을 줄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감독판에 들어간 이야기는 사족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죠. 감독은 이러한 장면을 힘들게 찍어 놨기 때문에 빼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배우들은 자신이 나오는 분량이 줄어들면 매우 기분이 나쁜 법인데, 이들과 긴밀하게 작업하는 감독이 이러한 장면을 잘라내기가 쉽지 않죠. 그에 비해 편집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촬영되었는지 모르고, 배우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기 때문에 관객만 생각하며 편집을 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따라서 영화계에선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편집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불문율이죠.

Script doctor나 편집자나 제작 과정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혼자서 하나의 작업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객관적 시각을 잃기 쉬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도와주면 blind spot에 숨은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저도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막히면 물어볼 수 있는 blog doctor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시작은 했는데 결말이 애매해 저장해둔 글들을 활용할 수 있겠죠?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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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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