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을 하는 분은 풋옵션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풋옵션은 주식을 특정한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입니다. 만약 내가 어느 회사의 주식을 주당 만원에 사들였고, 1년 후 이 주식을 주당 만원에 팔 수 있는 풋옵션까지 보유한다면 나는 주가와 상관없이 손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주가가 만 원이 넘는다면 풋옵션을 포기하고 시중가에 주식을 팔면 되고, 주가가 만 원에 미치지 못한다면 풋옵션을 행사해서 만원에 팔면 되기 때문이죠. 풋옵션은 이처럼 투자자에게 유리한 권리지만, 이러한 권리를 사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는 풋옵션 없이 주식만 거래하죠.

그런데 90년대말 미국 증시에는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풋옵션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그린스펀 풋이 그것인데, 물론 문서로 보증하는 정식 권리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문서 만큼이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그래프는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주가와 기준금리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앨런 그린스펀이 FRB 의장으로 취임한 1987년 이후 주가의 추이를 보면, 1987년 10월의 블랙 먼데이를 제외한다면 주가가 크게 내리지 않고 꾸준히 상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간에 미국이 S&L 사태, 걸프전, 멕시코 페소 위기, 러시아 디폴트 등을 겪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주가의 꾸준한 상승은 대단히 놀랍습니다. 이처럼 그린스펀이 FRB 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주가가 크게 떨어지지 않고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그린스펀 풋"이라고 불렀죠. 즉, 그린스펀에 대한 믿음 때문에 풋옵션을 사놓은 것만큼이나 마음이 든든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미국 경제가 최고의 호황을 누린 90년대엔 인터넷의 발달과 중국, 인도의 세계 경제 편입, 그리고 금융공학의 발달로 세계 경제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고 따라서 과거의 경제 상식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앨런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 자체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잘 대변합니다.

FRB 의장이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파티가 무르익을 때 술병을 없애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말은, 경기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면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높여 경기가 과열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뜻이죠. 경기가 과열되면 반작용이 일어나 다시 급랭하기 마련이고, 이는 경제 전체에 대단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면 경기기가 지나치게 과열되지 않도록 막아야죠.

그런데 만약 경제에서 불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불황이 없다면 경기가 과열돼도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억제할 필요가 없겠죠. 따라서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불황을 제거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경기 과열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저금리 정책을 써서 경기를 늘 호황으로 유지할 것입니다.

물론 그린스펀이 정말 호황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의 정책을 보면 그가 불황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걱정하지 않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기를 늘 과열상태로 유지하는 정책을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가 90년대에 주식 시장에 대해 "비이성적 과열"상태라고 경고한 것은 그가 전통적인 중앙은행총재 처럼 경기 과열을 경계한 예이지만, 이러한 예는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은 90년대엔 성공적으로 작용합니다. 당시엔 워낙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정책상의 실수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닷컴 버블이 터지고, 9/11 사태가 일어나고, 엔론과 월드콤이 파산하면서 미국 경제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린스펀은 다시 한 번 저금리라는 무기를 들고 불황을 사냥하러 나섭니다. 그러자 정말 곧 불황이 사라지고, 미국 경제는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역시 마에스트로"라고 그를 치켜세웠죠.

하지만 2000년대의 미국 경제는 90년대와는 다르게 체력이 매우 허약했고, 저금리 정책은 달러화의 약세와 이에 따르는 원자재 가격의 상승, 그리고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라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당황한 그린스펀과 그의 후임자 벤 버넝키는 물가를 잡으려 고금리 정책으로 돌아서죠.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합니다. 당시 주택 가격이 급등한 것은 돈을 쉽게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줄여버리니까 돈을 쉽게 빌리 수 없게 되고, 돈을 쉽게 빌릴 수 없으니까 빚으로 떠오르던 부동산 시장이 빚의 무게를 못 견디고 한순간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 하락 문제는 파생상품을 타고 금융계 전체로 퍼지고, 세계화를 타고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까지 퍼집니다. 금리 좀 올린다고 문제가 없을 것 같았는데, "어, 어" 하는 사이에 세계 대공황 이후로 최대의 위기에 빠지는 황당한 결과가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린스펀은 중앙은행의 능력을 과신했고, 중앙은행이 처신을 잘하기만 한다면 경제를 늘 호황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재임 동안 미국은 여러 가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주가가 꾸준히 오르는 호황을 누렸고, 그는 역사상 가장 인기가 높은 FRB 의장이 되었죠. 하지만, 그가 경기의 흐름을 무시한 결과 미국은 불황을 통해 경제를 교정(correction)할 기회를 놓쳤고, 그 결과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불황을 묶은 하나의 거대한 재앙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고 말했습니다. 그린스펀이 남긴 교훈은 지나치게 "지식의 힘"만 믿고 세상의 질서를 무시한다면 결국 큰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겪고도 이러한 교훈을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은 적은 것 같군요. 내일은 이에 대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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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지난주 미국 증시는 다우지수가 6500선까지 밀리는 약세장이 펼쳐졌습니다. 이는 미국 경제가 처한 어려움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공감대가 퍼졌기 때문입니다. 작년 9월 위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2009년 상반기면 어느 정도 위기가 끝나리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지금은 올해 안에 경기가 살아나리라고 보는 사람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이번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깨닫는 사람이 늘었다는 뜻이지요.

상황이 점차 악화하면서, 이번 경제위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방식에 대한 회의도 늘었습니다. 미국 정부. 그리고 FRB의 위기 해법은, 쉽게 말해 "돈을 풀어 해결하기"입니다. 돈이 부족해 위기에 몰린 은행,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주택담보 대출금을 못값아 고생하는 국민에게도 돈을 빌려주고, 정부의 예산을 늘려 더 많은 돈이 시중으로 흘러가도록 함으로, 결국은 경제 전체에 활기가 돌아 위기가 끝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지요.

하지만, 미국 정부가 450억 달러를 지원한 시티그룹의 주가가 1달러 선까지 떨어졌고, 134억 달러를 지원한 GM은 300억 달러를 더 요청하는 등,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어도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세금만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만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러니 다우지수가 곤두박질 쳐도 당연하겠죠.

경제위기가 시작한 지 6개월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 정부가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한 원인은, 미국 정부가 과거의 경제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이트너 장관이나 버냉키 의장은 미국 경제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의 이론대로 문제를 해석하고 해법을 찾지만, 이러한 경제학은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올바른 문제 해결의 길잡이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과거의 패러다임에 따른 해법을 많이 내놓을 수록 경제 상황은 점차 안 좋아질 수 밖에 없죠.

경제학은 진공 속에 존재하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피드백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는 학문입니다. 어떤 이론이 유행하다가, 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경제현상이 나타나면 새로운 환경을 잘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유행하는 식이지요. 예를 들어,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 때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최상의 효율을 낸다"는 아담 스미스의 주장은 국가의 간섭을 거부하던 신흥 상공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유효수요가 부족할 때는 정부가 재정을 풀어 유효수요를 진작해야 한다"는 케인스의 이론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효수요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경제 이론뿐 아니라 경제 제도도 현실이라는 실험을 통해 탄생하는 법입니다. 중앙은행이라는 제도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20세기 초까지 제대로 된 중앙은행이 없었습니다. 중앙은행이 돈의 흐름을 조절해 시민을 착취하는 또다른 권력이라는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1907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예금주들이 동시에 은행에서 예금을 빼가는, 이른바 "run on the bank"가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멀쩡한 은행들이 유동성 위기(liquidity crisis)에 빠지면서 무녀졌죠. 이러한 경험 때문에 중앙은행에 대해 거부하던 미국인들도 결국은 중앙은행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913년 연방준비제도 (the Federal Reserve System)가 탄생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연방준비은행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은행에 자금을 대줌으로 은행이 부도가 나지 않도록 막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탄생의 배경 때문에, 작년에 많은 미국 은행들이 위기에 빠지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 (the Federal Reserve System을 이끄는 지역 책임자를 governor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모인 조직이 the Federal Reserve Board죠)는 "아,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몰렸으니 우리가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엄청난 금액을 은행에 지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버냉키 의장이 추진한 quantitative ease 정책이었죠. 하지만, 1907년의 유동성 위기는 뱅크런 때문에 갑자기 자금이 부족한 은행들이 무너진 것이고, 2008년의 금융위기는 파생상품에 지나치게 투자한 은행들이 큰 손실을 보고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것이기 때문에, 같은 문제가 아니고,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FRB는 전통을 따라 은행에 현금을 퍼붓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돈만 낭비하고 은행 주가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결국, 이번 경제위기 해결이 늦어지는 원인은 미국 정부가 20세기 경제학과 20세기 경제 기구로 21세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제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이론과 경제 기구가 탄생하기까지, 세계 경제는 당분간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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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io
작년 가을 경제위기가 본격화한 이후로, 많은 사람은 "앞으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인가, 아니면 디플레이션이 올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엔 석유, 원자재, 곡물 가격이 많이 상승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위기가 심해지면서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달러화는 강세를 보였고,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미국 소비자 물가도 하락하자 이번에는 "1930년대식 디플레이션이 도래했다"는 주장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주가가 폭락하고 부동산 가격이 내리는 등 디플레이션의 징조가 보였지요. 저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았고, 그런 내용의 글도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인플레이션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듯 보이는군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환율의 급등 때문입니다. 작년초에 900원대이던 환율은 지금 1500원대를 훌쩍 넘은 상태이고, 얼마나 더 올라갈찌 모릅니다. 한국은 대부분의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는데, 환율이 오르면 원자재의 가격도 따라 오르고, 이는 곧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즉, 원자재 가격이 원화 기준으로 작년 초에 비해 50% 이상 올랐는데, 제품 가격이 그대로이긴 힘들지요. 물론 요즘 경기가 워낙 안 좋아 기업들도 제품 가격을 올리길 꺼리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고환율이 지속된다면 결국 물가가 오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은 바로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이었습니다. 원래 경기침체기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소비가 줄면서 물가가 내려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70년대에는 불경기였기에 물가가 내려야 정상이지만, 석유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는 이른바 오일쇼크 때문에 경제성장률은 낮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미국은 달러가 강세이니 수입 원자재의 가격 인상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은 원화가 약세니 이로 인한 물가 상승 요인이 대단히 큽니다.

또한, 벤 버냉키 FRB 의장의 "인플레이션 타게팅" 정책도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하겠습니다. 인플레이션 타게팅이란 인플레이션 목표를 정해 놓고 그만큼 물가가 오를 때 까지 돈을 마구 찍어내는 정책입니다. 지금 미국은 경제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소비가 줄면서 물가가 내리는 중인데, FRB는 물가가 1.7-2%까지 오르도록 돈을 풀 계획이라고 합니다. 버냉키는 FRB 의장이 되기 이전 부터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서라도 디플레이션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인데 (그래서 별명이 "헬리콥터 벤"이죠), 때마침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시기에 FRB 의장이 되었으니 그의 소원대로 원없이 돈을 풀 듯 보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은행을 살리기 위해 돈을 찍어내는 "Quantitative ease" 정책을 쓴 바 있는데, 이제 inflation targeting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장기를 자랑할 수 있겠네요.

물론 일반인은 "일부러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낸다"는 말을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많은 경제학자는 인플레이션의 순기능을 인정합니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물건 값이 점차 떨어지고, 따라서 사람들은 "조금 더 기다리면 가격이 더 내려갈텐데" 하는 생각에 소비를 더욱 줄이기 마련이죠. 따라서 디플레이션은 소비 감소를 일으키고, 소비 감소는 디플레이션을 부축이는 악순환이 발생하기에, 한 번 생겨난 디플레이션은 없애기가 매우 힘들죠. 그에 비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물건 값이 더 비싸지기 전에 빨리 사두자"는 심리에서 지출을 늘리고, 이는 곧 경제 성장을 낳습니다. 따라서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플레이션 창조입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저축을 많이 해 놓은 사람에게 큰 손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고, 지금처럼 임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물가마저 오른다면 많은 사람이 생활비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겠죠.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경제를 활성화하는 명약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소비자의 경제 스트레스를 늘여 경기를 더욱 악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어쨌든 버냉키의 소신이 "디플레이션 잡는 묘약은 인플레이션이다"이기에, 일단 물가를 올리기 위해 돈을 푸는 정책은 계속될 듯 싶습니다.

문제는 한국인데, 한국은 앞서 보았듯 미국과 다르게 원자재 수입가격 상승으로 물가 인상 요인이 큰데, 만약 미국을 따라 물가 인상을 부축이거나, 최소한 용인하는 정책을 쓴다면 물가가 겉잡을 수 없이 올라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정부는 금리 인하, 은행에 유동성 공급 등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베껴오는 중이기에, 인플레이션 정책도 옮겨오지 말란 법이 없죠. 한국은 고도성장과 더불어 물가도 많이 올랐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오면 이른바 "사재기" 등 과거에 보이던 비정상적인 소비행태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될 찌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사태를 악화할 뿐이죠.

물론 아직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저도 완전히 의견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디플레이션의 흐름이 이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인플레이션의 흐름이 이길찌는 조금 더 두고봐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결국 경제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것이 가장 빠른 문제 해결이라고 믿기에, 버냉키의 inflation targeting은 언젠가 큰 문제를 일으킬 위험한 정책으로 보이네요. 부디 한국 정부가 이런 정책을 본받는 우를 범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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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상품의 위험

경제 2008/12/12 15:29
파생상품은 돈과 현물을 직접 거래하는 전통적인 금융상품과 다르게 돈과 현물을 가치의 근거로 두고 여기서 파생한 권리나 수익을 거래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주식시장에서는 주식을 사고 팔지만, 파생상품인 선물 시장에선 미래의 주식을 사거나 팔 권리를 사고 팝니다.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금융거래에서는 돈을 빌리고 이자를 주지만, 파생상품인 IRS 거래에선 이자를 줄 권리를 사고 팝니다.

파생상품은 시장 참여자의 필요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고정금리로 돈을 빌려 놓고 "이자율이 떨어질텐데..." 하고 아까워하고, 어떤 사람은 변동금리로 돈을 빌려 놓고 "이자율이 오를 텐데..." 하고 걱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연결해서 고정금리를 내던 사람은 변동금리를 받게 하고, 변동금리를 내던 사람은 고정금리를 내게 합니다. 그러면 자발적인 거래를 통해 리스크의 비용이 결정되죠. 이것이 IRS 거래입니다. 이렇게 파생상품을 통해 리스크 관리가 이루어지면, 과거에 불확실한 리스크 비용 때문에 거래를 꺼리던 사람도 거래에 참여하게 되고, 따라서 시장이 활발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개발한 CMO (모기지담보증권) 때문에 많은 자금이 모기지 시장으로 몰렸고, 따라서 집을 사는 사람은 싼 이자로 집을 구입할 수 있었죠.

파생상품은 실물을 근거 자산 (underlying asset)으로 두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실물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를 정확하게 알기가 힘듭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맡긴 돈은 은행이 파산하지 않는 이상 안전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주식을 사면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가치는 보존되겠죠. 그런데 파생상품은 처음부터 특정한 조건이 되면 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에 (예를 들어, 주식 선물에서 콜 옵션은 미래의 특정한 날짜에 특정한 가격으로 주식을 사는 권리고, 따라서 그 날짜에 주가가 정해놓은 가격 보다 낮다면 가치가 전혀 없죠), 대단한 이변이 없이도 투자한 돈을 모두 잃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은행에 1억원을 맡겼다면 그 돈을 다시 찾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고, 주식에 1억원을 투자했다면 1억원 가까이 찾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높지만, 파생상품에 1억원을 투자했다면 얼마를 찾게 될찌 알 수가 없습니다.

파생상품은 실물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가치 판단이 힘들고, 따라서 파생상품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선 수학모델과 신용평가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파생상품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수학모델은 기관마다 다를 수 있고, 이럴 경우 가격을 산정하기가 어렵죠. 실제로 Trillion Dollar Meltdown에 보면 90년대에 은행돈을 빌려 CMO에 투자했던 데이빗 아스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은행과 아스킨이 다른 모델을 써서 가격에 합의할 수 없게 되자 은행에서 강제로 CMO를 팔게 했는데, 시장에 내놓으니까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투자한 돈을 모두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용평가기관은 객관적인 신용도를 평가해야 하는데, 이번 서브프라임사태에서 드러났듯 매우 위험한 채권에 AAA등급을 매기는 등, 자사의 이익을 위해 신용도를 조작한 예가 많습니다. 이처럼 파생상품의 위험도를 알기 힘들다면, 정확한 가치를 판단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죠.

파생상품은 위험이 높을수록 수익도 크기에 투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나라의 주식 선물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일반인이 주식 선물에 투자한다면 이는 투기성이 강하다고 봐야겠죠. 또한 파생상품은 전통적인 금융상품과 달리 규제가 허술하기 때문에 위험에 대한 대비도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크레딧 디폴트 스왑 (CDS)는 금융 거래를 할 때, 부도의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과 같습니다. 그러면 수수료를 받고 부도시 돈을 대신 갚기로 약속한 회사는 실제로 부도에 대비해서 돈을 비축해 놔야 정상이겠죠 (이는 보험회사가 실제 화재 등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 다른 보험회사에 재보험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금융기관은 CDS 거래를 하면서, 돈을 받기만 하고 부도에 대한 대비를 안해놨습니다. 이럴 경우 부도가 안나면 받는 돈을 100% 이익이 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죠. 그런데 최근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실제로 부도가 나는 회사가 늘었고, 이들 대신 빚을 갚아줘야 하는 회사들도 엄청난 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고수익만 추구하다가 파국을 맞은 셈이죠.

이러한 파생상품의 부작용 때문에 금융당국이 파생상품에 대해 철저하게 감독을 했어야 하는데, 미국 FRB 의장 그린스펀은 파생상품의 장점만 생각하고 파생상품이 증가하는 상황을 방치했습니다. 금리를 지나치게 낮게 유지한 것과 함께 그린스펀이 이번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는 이유죠.

한국은 선진국의 복잡한 금융상품을 도입하는데 늦긴 했지만, 최근 몇년간 은행에서 창구를 통해 많은 파생상품을 판매했습니다. 올해 한국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키코 (KIKO)나 주가지수 연동형 예금도 파생상품이죠. 그나마 최근에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파생상품의 위험을 깨달았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물론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고, 파생상품이 리스크 관리의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금융시장의 중요한 요소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투기적이고 무책임한 파생상품의 개발과 거래에 대해 지속적인 감시를 해야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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